2021년 9월 17일 금요일

[김지윤의 지식Play] 미국이 군인을 존경하는 이유는? 국가가 군인을 대하는 방법들! | 미국 군인 대우, 군대, 넷플릭스 디피, 영결식

[김지윤의 지식Play] 미국이 군인을 존경하는 이유는? 국가가 군인을 대하는 방법들! | 미국 군인 대우, 군대, 넷플릭스 디피, 영결식

 

 

D.P라는 넷플릭스의 드라마는 웹툰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군대 내에서 벌어지는 학대, 인간성 말살의 문제,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부조리를 밝힌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군인을 대하는 자세, 메모리얼 데이


미국에서 인상적인 것은 군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군복을 입은 군인에게 커피를 대신 사준다든지 아니면 레스토랑의 식사비를 대신 내준다든지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인이 처음부터 이런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독립전쟁(1775.4~1783.9)이 끝난 직후에는 직업군인에 대한 인상이 굉장히 안좋았다. 당시 직업군인이라고 한다면 왕을 지키는 근위대, 근위병이라고 생각했고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귀족의 자녀들이 장교가 많이 됐었기 때문에 장교에 대한 반발심이 굉장히 컸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참 군인이라고 했던 것은 militia, 즉 시민군이었다) 현실적으로 위생적으로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다. 그 당시에는 군법 같은 것이 확고하게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점점 커가면서 외국과의 전쟁을 하면서 군인들이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를 알게 되고 그러면서 군인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나폴레옹 전쟁의 일환으로 발발)을 치르고, 멕시코와의 전쟁,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군인의 존재에 대해서 상당히 다르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 지금처럼 전사한 군인들을 애도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현충일처럼 미국에는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가 있다. 메모리얼 데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남부의 여인들이 전사한 군인들의 무덤을 돌봐주던 것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유인이 된 흑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웠던 연방군들의 무덤에 꽃을 갖다 놓고 돌봐주면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니까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이 원조라고 하기도 한다.

 

186851일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존 로건 장군이 ‘530일을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묘지를 돌봐주고 꽃을 갖다 놓는 날로 정한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당시에는 메모리얼 데이가 아니고 데코레이션 데이(Decoration Day)라고 불렀다. 530일이 미국 전역에 꽃이 가장 만개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이 원조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186655, 뉴욕의 워털루에서 시작한 것이 원조라고 이야기를 한다. 시 차원에서 기념하고 그날 상점들이 모두 쉬었다고 한다.

 

데코레이션 데이로 시작한 메모리얼 데이는 1차 대전으로 점점 더 많은 전사자를 추모하게 된다. 공식 명칭은 1967년에 메모리얼 데이로 바뀌었다.

 

1971년 연방의회에서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게 된다. (1968628Uniform Monday Holiday Act로 메모리얼 데이를 포함한 4개 기념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고 날짜를 특정 월요일로 변경) 530일이었는데 이후 부터는 5월의 마지막 월요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을 쉬게 되는 효과가 나온다) 최근에는 원래 취지가 아니라 그냥 노는 날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30일로 옮기자는 주장도 있다.

 

유럽에도 비슷한 날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1111일을 Remembrance Day(또는 Armistice Day)라고 해서 지키고 있다. 영국에서는 Remembrance Sunday라고 해서 11월 두 번째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 아마도 제1차세계대전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1111일 오전 11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은 1111일을 메모리얼 데이가 아니라 Veterans Day(재향군인의 날)라고 해서 군 복무를 마치고 퇴역한 군인들을 위한 날로 지키고 있다.

 

11월, 빨간 양귀비꽃


11월이 되면 유럽의 많은 시민들 그리고 정치인들이 가슴에 빨간 꽃 배지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빨간 양귀비꽃이다. (프랑스는 수레국화, bleuet de france)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의 플랜더스 지방은 격전지였다. 프랑스의 서부전선 최대 전투인 베르됭 전투에서는 1,250,000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벨기에의 1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본격적인 참호전이 시작되었고, 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되었다. 포탄과 화염으로 황페해진 이곳에서 1915년 봄이 되니까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지역에서 빨간 양귀비꽃이 피었다고 한다. 당시 캐나다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존 매크레이(John MacCrae) 중령이 이 양귀비 꽃밭을 보고 상당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2차 이프르 전투를 겪고나서 시를 하나 썼다. 2차 이프르 전투(1915.4.22~5.25)에서는 독일군이 최 초로 염소 가스를 사용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연합군 측에서 87,0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독일군도 40,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존 매크레이 중령이 쓴 시의 제목이 In Flanders Fields(한글 제목 : 개양귀비 들판에서)였다.

 

플랜더스 들판에 양귀비꽃이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가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이 시를 미국의 모이나 마이클이라는 조지아 대학교의 한 여교수가 읽고 굉장히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빨간 양귀비꽃을 천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팔고 돈을 모아 돌아오는 군인들을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도 안나 게랑이라는 여성이 천으로 빨간색 양귀비꽃을 만들어서 팔고 그 돈으로 폐허가 된 프랑스, 돌아온 참전용사들을 위한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지난 2021826일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공항(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있었다. 이때 미군들이 아기들을 안고 있는 사진이 많이 알려졌다. 그 사진 속에 아기를 안고 있는 한 여군 병장(니콜 지, 23)이 있었다.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한 13명의 미군 중 한명이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흐릿한 모습이 찍힌 사진이 올려져 있고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I love my job”

 


[영화, 챈스 일병의 귀환]


2009년에 개봉된 영화 Taking Chance(챈스 일병의 귀환)가 있는데 여기서 Chance는 기회, 찬스가 아니고 챈스 팰프스라는 한 일병의 이름이다



케빈 베이컨이 주인공인 마이클 스트로블 중령의 역할을 맡았는데, 마이클은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챈스 펠프스의 운구를 직접 하겠다고 나선다. 동향인 것을 제외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중령의 입장에서 운구를 할만한 그런 위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부에서 와이오밍 주까지 본인이 직접 운구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라크전에 나가있는데 자기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가족들과 함께 정보장교로 남아있다는 것에 양심이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챈스 일병의 운구 여정을 큰 클라이막스 없이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럼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서 멀쩡할리 없는 챈스 일병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깨끗하게 새 제복을 입히고 그의 유품들도 모두 깨끗하게 정리를 한다. 유품에 묻어있는 핏자국도 다 씻어내고 유족들에게 건네줄 성조기도 준비한다. 챈스 일병의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 때문에 두 장을 준비하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운구를 하게 된 마이클에서 주의사항을 건네주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챈스 일병이 어떻게 전사했는지에 대해서 추측성 발언이나 혹은 정황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 운구를 하게 되는 관이 차에 옮겨지거나 비행기에 옮겨질 때에 꼭 옆에 서서 조의를 표하고 경례를 하라는 것이었다. 운구할 때 경례할 때 공항에서 함께 일하던 노무자들도 모자를 벗고 조의를 표하곤 하였다. 마이클은 챈스와 함께하는 동안 제복을 절대 벗지 않고 그가 들고 가는 챈스의 유품이 공항의 엑스레이를 통과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항공사의 직원은 좌석을 일등석으로 알아서 바꿔주기도 하고 또 승무원은 자신의 소중한 십자가를 건네기도 하였다. 비행기의 기장은 지금 전사한 일병의 운구를 하는 사람이 타고 있으니 마이클이 먼저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승객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한다.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좁은 2차선 도로에서 이 차량이 전사자의 운구 차량임을 알아보고 다른 차량들이 깜박이로 조의를 표하고 앞서가던 두어 대의 차량이 앞장을 서고 운구차 뒤에 있는 차량들은 그 어떤 차도 추월을 시도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막중했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마이클이 담담하게 고백을 한다


한번도 본 적 없지만 그리워질 것 같다.” 


영화의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가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될 일은 그들을 기억해 주는 일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와 시민이 군인들에게 해야 되는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군인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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