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3세기 일본 천황가 발상지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김해 지역에서 나오는 가야 유물과 동일 북한학자 김석형 분국설로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임나일본부설 폐기돼야 #3
일본 식민사학의 주요 구조 중의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오늘날 남한의 강당사학자들은 겉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은 다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임나일본부설의 요체는 ‘가야가 임나’라는 것이다.
노태돈이라는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라는 사람은 ‘왜의 세력이 가야에서 단기적으로 군사솰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는 아니었다’, ‘ 영역 지배는 없었다’ 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외국의 군대가 다른 나라의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하는 것을 뭐라고 이해해야 하나? 외국군인 야먀토왜의 군사가 가야에 와서 단기적이고, 장기적으로 군사활동을 했다면 그게 식민지라는 이야기 아닌가?
‘야마토왜의 군대가 가야에 와서 군사활동을 했다’ 라고 말해 놓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으니까 ‘그러나 영역 지배는 없었다’라고 슬쩍 뒤로 빠지는 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을뿐더러 당당하지도 못한 자세이다. 이렇게 앞ㆍ뒤가 안 맞는 이야기들을 하니까 학생들이 국사교과서를 공부할 때 암기과목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분야에 대해서 북한의 학자들은 어떻게 주장을 하는가? 그들은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 분국, 식민지다’ 라는 소위 ‘분국설’을 주장한다.
월북했던 대구 출신으로 경성제대 출신의 김석형이라는 역사학자가 1963년도에 발표한 논문이 일본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논문의 제목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이다. 이 논문에서는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 열도에는 지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계 지명이 아주 수두룩하다. ‘당나라 당’(唐)자가 쓰여져 있으면 가야계란 뜻이다. 당을 일본어로 ‘가라’라고 읽는데 ‘가라’가 바로 ‘가야’다. 그리고 ‘큰 한’(漢)자를 쓰면 중국 한나라가 아니라 이것도 발음상 ‘가라’라고 읽기 때문에 ‘가야’라는 뜻이다.
‘흰 백’(白)자에 ‘나무 목’(木)자... ‘백목’(白木)자로 쓰여있는 지명이나 사람의 성씨는 신라계를 뜻한다. 신라를 일본어로 ‘시라기’라고 읽는데 ‘백목’도 똑같이 ‘시라기’라고 읽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 열도에는 무수히 많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계 지명들이 남아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거기에 계속 살았다는 증거이다.
『일본서기』에는 이해 못할 기록들이 여러 개 있다. ‘신라에서 야먀토왜에 8년 동안 조공을 안바쳤다. 그래서 야마토왜가 쳐들어올지 모르니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때 고구려가 보낸 병력의 숫자가 100명’이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당시에 고구려가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100명이 와서 지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임나의 닭이나 개가 울면 백제 사람들이 어느 집 개나 닭이 우는지 안다’라는 기사도 있는데, 임나가 가야라면 경상도에서 ‘개소리’와 ‘닭소리’가 들리면 충청도나 전라도 사람이 어느 집 개나 닭이 우는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가?
북한의 김석형이라는 학자는 1963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분국들이 아니라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 분국이다’ 라고 주장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1882년) 조작했다’라는 내용을 발표해서 일본 사회에 엄청 큰 충격을 줬던 이진희라는 재일 역사학자가 이 논문(김석형의 논문)을 일본어로 번역시켜서 일본의 학술지에 이 논문을 게재하였고, 일본 학계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일본 ‘큐슈’와 오사카의 ‘나라’ 근처에는 가야 백제계 유적, 유물이 수두룩하다. 일본의 큐슈 남부에 미야자키현이 있는데, 미야자키현의 남쪽에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일본에서도 ‘천황가’(일왕가)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3세기 후반이다.
일본 왕가의 시작은 3세기말에 사이토바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모자는 한반도의 고령 지산동에서 나온 가야 철모와 똑같다. 그렇다면 같은 세력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천황가의 시작은 가야계가 진출해서 시작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임나’는 어디인가? ‘임나’는 일본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카야마(岡山)현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야계 사람들이 쌓은 성, 무덤 출토 유물들이 많다. 북한 학자들은 바로 ‘오카야마현이 임나’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김석형이 ‘분국설’을 주장했을 때 남한 학자들만 이 ‘분국설’이 맞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없는데, (요즘 일본이 자기네 교과서에 임나는 가야라는 주장이 사라졌을 것인데) 남한 학자들이 오히려 ‘분국설’이 나오면 일본인 학자보다 더 분노해서 비판하고 있다. (친일파 앞잡이 DNA를 가지고 있나?)
2016년도 『역사비평』에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에 썼던 ‘무서운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분국설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분국설에 대해서 남한 학자들이 그렇게 분노할 이유가 뭐가 있나? 이 사람들 마음 속은 총독부에서 만든 역사관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1980년대 후반경에 김해 지역의 유적 유물하고 일본 큐슈 지역이 유적 유물을 상호 비교해 본적이 있다. 이때 약 10대 1의 압도적 비율로 김해 지역 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국가를 세우고 생활했다는 고고학 자료들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 역은 성립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다 인정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의 극우파들이 더욱 급해져서 (학생들은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대주고, 교수들은 연수비용을 대주면서) 한국학자들을 불러들여서 이들을 교육시키고,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의 대학 사학과에서 ‘임나가야설’을 주장하게 하는 쪽으로 바꿨다. 일본 A급 전범이었던 사사카와가 만든 사사카와 재단과 일본 문무성이 뿌린 돈으로 일본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는 사람이 많다. 한국은 일본에서 박사학위 받고 오면 교수되기 쉬운 구조이다.
북한에서는 이미 1963년도에 이미 임나가야설을 해체시켰고, 조희승이라는 재일교포 출신의 역사학자가 ‘임나는 오카야마현이다’ 라고 특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데, 남한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임나가 가야다’라는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황이니 북한이 경제적으론 어려워도 남한 사회를 볼 때 대안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남북한이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관이 같아져야 한다. 이것은 이념을 떠난 문제이다. 남북한이 역사학으로 통합하는 길은 1) 단군을 우리 국조로 인정하는 것과 2) 낙랑군 한사군은 북한 지역에 있지 않았고,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것과 3)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 소국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