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31] 조선반란사 No.1 이괄의 난, 조선 역사에 이런 남성다움이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 이시언 모반사건(1623)
- 유몽인 모반사건(1623)
- 박홍구 모반사건(1624)
- 유효립 모반사건(1628)
1624년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의 난은 조선시대에 반란군이 일어나서 도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가 될 것이다. (이괄의 난을 소재로 만든 만화로 《칼부림》이라는 작품이 있다)
원래 이괄은 인조반정 때 주동자 중의 주동자였다. 문신 관료 김류가 두려워서 집밖에 나오지 않고 있을 때, 이괄이 모든 군사작전을 주도하고 전개하였다. 그런데 반정이 성공한 후에 이괄은 1등공신이 아닌 2등공신으로 선정되었다. 이괄의 아들이 참여했지만 공신록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고,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2등공신으로 자신과 동급이 되었다. (이로써 이괄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괄은 반정 이후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시장?)이 되었지만 공신에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당시에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1616년)하고 세력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연륜이 있는 장만(1566~1629)을 도원수로, 젊은 이괄을 부도원수로 임명하였다. 이괄은 영변에서 1만 병력과 함께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게 된다.
당시 1등공신의 4대장들은 호위병력 400명씩 거드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괄도 사병을 양성하였는데 그는 항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항왜자들 중에 서아지(徐牙之, ?~1624)를 중심한 13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아들 이전은 한양에 있을 때 개국공신들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에 김류 등의 문신들이 이괄을 반역죄로 잡아들이라고 했지만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괄이 아니면 이괄의 아들(이전)이라고 잡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영변으로 향하였다.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쳐버리고 난을 일으킨다.
이괄은 한명련(?~1624)이 모반죄로 잡혀가는 것을 구해주었고 한명련은 이괄의 난에 합세한다. 이때 안주목사였던 정충신(1576~1636)과 평양에 있던 도원수 장만은 이괄에게 합세하지 않았다. 이괄은 정충신과 장만과 대결을 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추격하는 정충신과 이괄은 황주에서 제대로 맡붙게 된다(황주전투, 1624.2.2). 처음에 이괄의 병력 1만 3천 중에서 3천은 시작 때 이괄과 함께 하지 않고 이탈하였다. 황주전투 직전에 이괄의 병력 1천여명이 정충신의 부대에 항복하고 합류하게 된다. 그런데 그 뒤로 항왜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괄의 부대가 진격하여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정충신의 부대를 궤멸시켰고 정충신은 후퇴하게 된다.
이괄은 예성강을 넘어야 했다. 예성강을 건너는 전투가 마탄전투(1624.2.7)였는데, 이곳은 이중로가 막고 있었다. 관군은 예성강을 건너는 기병에게 조총으로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괄이 후미에서 함포를 쏘아서 기병이 강을 건너는 것을 도왔다.
예성강이 뚫리자마자 인조는 호남으로 도망가려고 공주 공산성으로 향하였다. 도망치는 도중에 말 위에서 죽을 먹었던 곳은 오늘날 ‘말죽거리’라고 전해진다. 인조는 간신히 한강을 건너서 수원까지 도망을 쳤다. 한편 이괄이 한양으로 진격할 때 파주목사 박효립은 군대를 빼버렸기 때문에 이괄은 방해없이 2월 10일에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인조와 함께 도망을 치던 인성군(1588~1628), 흥안군(1598~1624) 중에서 흥안군은 도중에 한양으로 가서 이괄을 만나게 된다. 이괄은 이때 자신이 왕이 될 것인가 흥안군을 앉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흥안군을 앉혔지만 흥안군은 당시에 백성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괄의 최대의 실수는 그대로 기병을 보내서 인조를 잡지 않은 것이다.
인조는 한양을 탈출하면서 기존의 모반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기자헌(1562~1624), 이시언(1579~1624) 등의 신하들이 이괄에게 합류할 것을 두려워해서 죽여버리고 도망친다. 이때 이괄의 부인과 며느리도 처형시켰다. 이것을 한양에 들어온 이괄과 이괄의 아들이 보고 충격을 받아 하루를 지체하게 된다.
이때 장만과 정충신의 부대가 북쪽에서 내려왔고, 안현(무악재)에서 이괄의 부대와 전투가 벌어졌다(1624.2.11). 당시 관군은 안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괄의 부대는 무악재로 향하면서 백성들에게 도성에 올라가서 전투를 구경하라고 알렸다고 한다. 처음에 산 위로 항왜자들이 진격을 하였는데, 당시에는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불고 있었기에 관군이 조총을 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바람이 산 위에서 아래로 불기 시작했고, 정충신이 위에서 고춧가루를 뿌렸다고 한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한명련이 조총을 맞고 부상을 당했는데 관군은 한명련이 죽었다고 함성을 지르게되고 이괄의 부대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이때 이괄의 대장기도 꺾여지면서 이괄이 도망친다는 함성이 들렸고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관군에세 이괄의 부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이괄은 남은 병력을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백성들이 성문을 닫아버렸다. 이괄은 이후 여주 이천까지 도망을 쳤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괄의 부하들이 배신을 해서 이괄, 한명련, 이괄의 아들 목을 잘라서 인조에게 바치면서 이괄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탈출하여 후금으로 건너갔고, 광해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한윤이 길잡이가 된다(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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