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7일 금요일

[조선25] 선조 아들들 (개망나니,돌아이,연쇄살인마) 이야기

[조선25] 선조 아들들 (개망나니,돌아이,연쇄살인마) 이야기

 


선조의 개망나니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

 

조선의 최악의 군주 후보들은 아마도 선조(재위 1567~1608), 인조(재위 1623~1649), 연산군(재위 1494~1506), 고종(재위 1863~1894)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선조 앞의 모든 왕들은 중전마마의 아들이었는데, 선조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의 세 번째 아들이었고 엄마도 일반인이었다. 세자도 되기 어렵고 왕이 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왕권이 약해져도 할 말이 없었지만 왕이 된 후에 나름 왕권을 유지해 나간다.

 

이런 선조 시대에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조선 후기 정치가 개판이 되는 그 시작이 붕당이었다. 선조는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로 천명이 넘는 인재들을 죽여버리기도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의 무능함은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다.

 

선조는 1411녀를 낳았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였는데, 1602년에 간행된 조선왕실의궤는 의인왕후 것이라고 한다. 구리의 동구릉에 가보면 조선의 왕들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선조의 무덤이 가장 넓고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의인왕후가 자식이 없어 후궁을 들였는데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으면서 죽었기 때문에 선조는 사랑하는 아내를 죽이고 태어났다고 하면서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선조는 51살에 19살의 인목왕후 김씨를 왕비로 맞이한다. 이 인목대비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영창대군이다.

 


같은 왕에게서 개차반 아이들(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이 태어났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민심을 다독거리고 의병을 모으라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냈다. 그런데 강원도로 간 순화군은 가토와 시마즈가 강원도를 점령하자 형이 있는 함경도로 가게 되었다. 함경도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했고, 오죽했으면 당시 함경도의 국경인, 국세필 등이 왕자들을 잡아서 일본군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이후에 정문부 장군(1565~1624)이 국경인과 국세필을 제거하였다. 정원군(1580~1619)의 큰아들이 능양군으로 훗날 인조반정으로 왕에 오르는 인조(재위 1623~1649). 선조가 가장 예뻐했던 것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당시 분조를 할 때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광해군(18)에게 맡긴 것이다.

 

임해군(1572~1609)은 능력없는 왕자로 선조의 첫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송강 정철(1536~1593)이 세자 건저의 문제(1591)로 쫓겨나는 과정에서 정철을 죽이자는 의견을 놓고 동인이 이산해(1593~1609)를 필주로 하는 북인과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으로 쪼개지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에 동인과 서인 모두는 세자로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선조의 개차반 아들들 :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양녕대군(1394~1462)은 세자로서 해서는 안될 일들을 했지만, 나름 낭만이라도 조금 있었다. 그런데 임해군에게는 그런 낭만조차 없었다. 그냥 강도, 약탈, 살인, 겁탈, 강간, 재물탈취 등 실록에 무수히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현직 도승지(왕의 비서실장) 유희서(1559~1603)의 부인이 예뻐서 유희서가 성묘갔을 때 자객을 보내서 강도당한 것처럼 꾸며서 다 죽여버린다. 이 도승지가 한음 이덕형(1561~1613)과 사촌간이어서 이덕형이 왕자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난리를 부렸다. 도승지를 죽였던 자객들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할 것이 두려워서 임해군은 자객을 보내서 그들도 죽여버렸다.

 

정원군은 기록이 많이 없다. 인조가 즉위해서 광해군일기를 썼는데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차마 욕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찬양하는 글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실록에 임해군과 정원군은 똑같은 놈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순화군(1580~1607)은 살인마(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그냥 사람을 일년에 평균 10명씩 죽였다. 의인왕후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룰 때 의인왕후의 관 앞에서 의인왕후를 따랐던 궁녀를 겁탈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론상 궁녀는 왕의 여인이기 때문에 아버지 선조의 여인이었다. 결국 순화군은 수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개망나니 짓을 해서 백성들이 오히려 도망쳐버렸다고 한다.

 

[임해군 관련 기록]

 

다만 여러 왕자들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선조실록

 

임해군이 전 주부 소충한을 지척의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였습니다. 대낮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했으니 국가의 법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선조실록

 

임해군 이진이 행동이 무상하여 못된 짓을 끝도 없이 자행합니다. 사가에서 사람을 구타하여 죽이기도 하며 토지와 노비 등을 마구 빼앗고 백성을 속여 사리에 어긋나게 대가를 거두며 종을 시켜 어염집을 약탈하니 원성이 끊어 오릅니다.선조실록

 

[임해군, 순화군 관련 기록]

 

순화군이 일찍이 임해군에게 나는 비록 경망하여 사람을 구타하지만 형이 남의 전택(田宅)이나 장획(臧獲)을 빼앗는 것보다는 낫다하였는데, 사람들도 이 말만은 그렇다고 여겼다. 대개 임해는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마구 빼앗았으니 그 악독함이 더욱 가혹하였다

 

[정원군 관련 기록]

 

정원군과 그 노비들이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였음에도 노비들조차 추문하지도 못 했으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정원군의 폐단이 극도에 이르러 모든 원망이 왕에게 모이니 한탄스럽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자식을 의롭게 키우려 한 것이다. 사관의 장계

 

* 하원군(1545~1597)은 선조의 형으로 정원군은 큰어머니를 납치한 것이다.

 

원종 대왕(정원군)이 훙()하였다. 대왕은 어려서부터 기표(寄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를 사랑을 받아 전후로 선물을 내려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광해군 일기

 

[순화군 관련 기록]

 

(순화군)의 성기(性氣)는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 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와 같은 것에 광패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일지라도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시켜야 만족해 하였다.선조실록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선조실록

 

순화군 보((𤣰)가 졸하였다.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부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을 피하듯이 하였다. 선조실록

 

[그 외 순화군 관련 기록]

 

  •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면 채소밭을 맡고 있는 자를 잡아다가 직접 몽둥이로 두들겨 팸
  • 소고기와 생선을 올리지 않는다고 창고지기 집을 불태움
  •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을 옷을 전부 벗겨 결박하고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음
  • 순화군이 굿을 하고 있는 무녀의 위 아래 이빨과 무당을 부른 사람의 위아래 이빨을 9개씩 쇠뭉치로 때려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림. 두 사람은 모두 죽음

 

이런 개망나니 아들 중에 그나마 제대로 된 아들이 광해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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