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7일 금요일

[김지윤의 지식Play] 아프간 사태로 보는 이슬람 문화 정리! with 알파고 | 중동,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김지윤의 지식Play] 아프간 사태로 보는 이슬람 문화 정리! with 알파고 | 중동,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분쟁, ‘제국의 무덤’(Graveyard of empires)에 대해서 이해를 돕기 위한 배경지식을 얻기 위해 알파고 시나씨(Alpago Sinasi, 기자, 작가 겸 방송인)와 함께 했다.

 

[다민족 국가 아프가니스탄]

 

여행을 위해 검색을 하면 14, 15, 16세기에 이슬람 문명에 의해 세워진 도시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당시에 잘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후 서쪽에서 오스만 제국이 완전히 그 지역을 다시 한번 통일시키고 모든 실크로드하고 스파이스 로드를 장악하였다. 서양과의 접촉이 힘들어지게 되고 경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경제 하락을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이 선택한 것은 약탈경제였다.

 


한국사람들은 단일민족, 민족국가라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다민족국가에 대해 생소하다. 그런데 문제는 단일민족국가가 되려면 어떤 통로 앞이나 끝에 있어야 하는데 중간에 있으면 단일민족국가가 되기는 힘들다. 아프가니스탄은 대다수가 일종의 이란 계통의 민족인 파슈툰족이다. 아프가니스탄 인구 약 3,700만 중에서 42%1554만이 파슈툰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파기스탄에는 파슈툰족의 2배 인구인 약 3465만명이 살고 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우즈베크인 83.7%), 키르기즈스탄(키르기스인 73%)이 그나마 대다수의 인구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스탈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민족별로 강제로 모아놓은 것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2007년에 영화화되었다. 주인공은 파슈툰이고 자기랑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고 친구처럼 형제처럼 자랐는데 하인(주인공의 절친)은 하자라인으로 등장한다. (사실 현실적으로 중동에서는 같은 모유를 마시면 결혼할 수가 없다) 하자라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언급된다. 하자라족은 시아파의 12이맘파를 믿는 소수민족인데 아프가니스탄에서 10%를 차지하고 있다. 몽골계통에서 유일하게 하자라족이 시아파이다.

 

인도네시아 전문이었던 베네딕트 앤더슨(1967~2002, 코넬대 교수)이 쓴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 보면 다민족 국가가 어떻게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네덜란드 군을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민족들이 같이 몰아냈는데, 민족과 인종이 달라도 다 같은 인도네시아 사람이라는 개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제국주의를 몰아낸 경험이 없고, 처음에 왕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대통령을 세웠는데, 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들이 몰아내면서 내부적으로만 싸웠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경험이 이 나라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공산주의 쿠데타까지]

 

옛날에는 미니스커트까지 입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오늘날 폐쇄적인 부르카를 쓰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왕은 자히르 샤(1914~2007)라고 한다. 왕이 쿠데타로 날아간다. 사촌 동생인 다우드 칸(아프가니스탄 초대 대통령, 1973~1978)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왕권을 없애고 공화국을 세웠는데 다우드 칸은 공화국답게 통치하지 못했다. 함께 쿠데타를 했던 진보적인 군인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을 갖게 되었고, 현대화를 시도하면서 미니스커트까지 입는 정도에 대해서 지방의 성직자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1978년 좌익 군인들이 주도한 두 번째 쿠데타(1978 Saur Revolution)는 약간 잔인한 쿠데타였다. 다우드 칸의 가족이 몰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1978~1992,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이 선포된다.

 

[공산주의와 이슬람 성직자들의 대립, 소련과의 전쟁]

 

그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이 대립하였다.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의 차이였다. 이슬람은 사유가 착한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는데, 사유를 완전히 없애버리면 시험할 수가 없다. 이것은 하느님(알라)에 대한 항의라고 본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도 지켜볼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카불에서 정권을 잡은 것이고, 지방에서는 항상 지방의 우두머리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이 있던 시대에는 지방의 우두머리에게 뭔가를 베풀었기 때문에 왕권이 유지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배경도 없고 세력도 약했으며 수도 중심이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처음에 소련도 망설였다고 한다. 소련은 당시 150개 이상의 다민족 국가였는데 군대를 보내면 그 안에 분명히 타지크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즈벡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가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같은 민족과 싸우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8년 체코를 침공한 이후 남이 나라에 들어가지 말자는 여론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무신론자들이 남의 땅을 쳐들어왔다고 저항심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외적이 아니라 하느님(알라)의 외적이었다. 그때 무자헤딘이 생긴 것이다.

 

무자헤딘은 단순한 단어이다. 아랍어에서는 앞에 MU를 붙이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드’(성전)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 MU : ~하는 사람
  • JIHAD : 성전
  • IN : ~
  • = MUJIHIDIN (성전하는 사람들)

 

무자헤딘이 나왔고, 그들도 분파별로 학교별로 종파별로 생겨났다. 무자헤딘은 삼국지연의의 반동탁세력으로 생각하면 된다. 무자헤딘의 유명한 사람으로 무하마드 오마르’(1960?~2013)이 있다. 이 사람은 파슈툰족이고 신학 공부를 위해서 파키스탄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극단적이고 원리주의에 가까운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공부하고 돌아온 그가 소련과 싸울 때 제자들을 데리고 전쟁을 했는데 전쟁을 너무 잘했기 때문에 장군급으로 성장한다. 소련이 철수한 뒤에 반동탁세력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하였다. 무자헤딘은 나라 개념이 없어서 누가 나라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놓고 싸운 것이다. 무하마드 오마르는 자신들이 신학생들이라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 자기의 지역에서 안전을 지키고 자신의 지역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점차 영향력이 생기자 탈레반’(학생들)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96년에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89년에 소련이 철수하게 되었을 때, 당시 모하마드 나지불라(1987~1992, 아프간 국가원수)가 소련을 붙잡았다고 한다. 당시 고르바초프가 무기랑 다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뒤를 봐준다고 나갔는데 이후 소련이 1991년에 해체되면서 손을 쓸 수가 없게 되고 1992년에 아프가니스탄이 망한 것이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그리고 알카에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은 사실 911테러 때문이었다. 그때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 있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당시 미국이 무자헤딘을 지원하려고 했는데 직접 지원하면 안되니까 중간에 수많은 중간책을 통해서 지원을 하는데 오사마 빈 라덴은 그 중간책 중의 하나였다. Maktab al-Khidamat(MAK)라는 단체를 만들고 미국의 후원금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이 가라앉으니 오사마 빈 라덴이 백수가 된 것이다. 새로운 본거지가 필요하니까 90년대에 이슬람 문화권에서 제일 뜨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수단이었다. 그래서 빈 라덴이 수단으로 간다. 거기서도 알카에다를 선포하고 만든다. 알카에다 때문에 미국이 수단을 자꾸 폭격기로 골치 아프게 만드니까 수단 대통령이 오사마 빈 라덴한테 나가라고 했다. 그때 때마침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옛 동료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간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니까(2001.10.7) 탈레반이 UN에 항복 의사를 밝혔다(2001.11.19). 1990년대에는 테러가 대우받던 시대였다. 당시에 소련과 유고가 무너졌고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하고 싶어하던 시대였기에 테러조직들이 그 지역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아프간 정부가 무너진 후에 알카에다는 바로 이라크로 가게 된다. 이라크로 간 알카에다의 일부가 오늘날 IS로 재등장한 것이다.

 

[이슬람의 극단주의 등장의 배경]

 

IS 호라산은 뭔가? IS의 아프가니스탄 가맹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호라산은 역사적으로 이슬람 사료를 보면, 아프가니스탄 주변 지역을 호라산(Khorasan, 태양의 땅)이라고 한다. 아브가니스탄 IS 호라산이 카불 공항테러를 저질렀는데, IS 입장에서는 탈레반은 이제 이교도가 된다. 미국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손을 잡는 순간 이교도가 되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악마들인데, 악마랑 손을 잡는 순간 그들도 이교도가 되는 것이다.

 

중세까지만해도 이슬람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고 한다. 이슬람 제국들이 융성하고 교역을 하려면 개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중세 때에는 기독교가 보수적이었다) 어쩌다가 이슬람이 폐쇄적이 되었을까? 1) 대항해시대에 무슬림이 대응하지 못하였다. 대항해시대를 통해서 유럽의 구질구질한 나라들이 갑자기 부를 갖게 되었다. 중간에 있는 무슬림들이 방심했다는 것이다. 2) 유럽에서는 종교가 너무 보수적으로 가다 보니까 중간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개혁 덕분에 교육이 개혁되었는데, 이슬람쪽에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놓쳐버린 개혁의 시기). 11세기에 이븐 시나가 썼던 의학책이 유럽에서는 17~18세기까지 대학교의 교과서였다. 3) 경제적 몰락이다. 새로운 경제 통로가 생기니까 돈이 없어지면서 보수적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극단적인 원리주의가 탄생한 것은 13세기 몽골의 침략 때문이었다. 당시에 이슬람원리주의의 출발점이 된 이븐 타이미야라는 시리아의 신학자는 비주류 학파였다. 제국주의 세력이 이슬람 지역을 식민지로 하려고 하다 보니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문제도 제일 많고 원리주의자들이 제일 많은 나라를 보면 식민지배를 너무나 강력하게 받았던 지역들이다.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어떻게 수많은 무슬림들을 관리하냐고 물어봤는데, 영국은 우리의 주적은 군인이 아니다. 종교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학교 교사들이나 원장을 죽이라고 한다. 종교 지식인들이 죽어버리고 종교가 무식한 사람들에게 넘어가니까 썩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슬람 수니파의 4개 종파, 그리고 살라프파와 와하브파]

 

오늘날 수니파가 세계를 장악하고 시아파는 이란과 이란의 위성국가로 축소가 된다. 수니파 안에서는 종파가 4개가 있다.

 


  • 하나피파(Hanafi) : 네 학파 중 가장 오래됨.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합리성을 추구
  • Shafi'i(샤피이파) : 말리크파와 하니파의 법 이론을 통합 및 절충
  • Maliki(말리크파) : 꾸란과 하디스 뿌난 아니라 메디나 전통과 전승에 준거하여 법 이론을 발전시킴
  • Hanbali(한발리파) : 전통과 전승에 대한 확고한 신념.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함

 

이들 종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종파는 하나피파와 샤피이파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주로 다 하나피하고 샤피이파다. 이 종파들은 사람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하나피파에서는 새우르 먹으면 안된다. 샤피이파는 먹어도 된다. 하나피파와 샤피이파에서는 테러리스트가 나오지 않는다. 말리크파는 완전히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 중에 제일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한발리파가 되었다. 한발리파도 사람을 가서 죽이라는 말이 없다. 한발리파 안에서 가장 극단적인 파가 살라프파(이슬람 근본주의 이븐 타이미야의 소속)였고 이븐 타이미야가 속했던 파이다. 살라프파 직전에 있는 종파가 와하브파다. 와하브파는 가장 엄격한 종파인 한발리파 안에서 제일 끝에서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종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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