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26] 광해군은 개혁군주인가? (34분 순삭ver.)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서 공식적인 폭군 2명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조선왕조 실록은 왕이 죽은 후에 실록청에서 ‘사초, 시정기, 등록’ 등을 참조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사초 : 실록ㆍ일기 등 역사편찬의 첫 번째 자료소서 사관이 매일 기록한 원고
- 시정기 : 조선시대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한 국정 기록물
- 등록 : 조선시대 문서의 보존과 열람의 편의를 위하여 베껴서 옮긴 문서철과 그 행위
고종(1852~1919), 순종(1874~1926)이 죽었을 때는 춘추관에서 실록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엄밀하게 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왕조 실록이라고 하면 태조 이방원부터 강화도령 철종까지를 의미한다. 이들 중에 실록이 아닌 일기로 명명된 군주가 세 명이 있었는데 연산군과 광해군, 그리고 노산군이었다. 훗날 노산군은 숙종 때 복원되어 ‘단종실록’이 된다.
일단 광해군은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긍정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실제로 수능에서도 군주들의 업적을 언급할 때에는 15세기 태종, 세종, 세조, 성종과 18세기 영조, 정조와 함께 17세기 광해군을 많은 출제하고 있다. (요즘에는 재평가 작업이 되고 있다)
[서자 광해군]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 그런데 서자로 태어난다.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는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광해를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린다. 그래서 광해군은 어린 시절부터 선조의 사랑을 받지못하고 자란다. 형인 임해군과 함께 광해군은 의인왕후 박씨에 의해서 키워진다. 이후 선조가 인빈김씨를 통해서 4명의 자식을 낳게 되는데 훗날 인조의 아버지인 (양아치) 정원군이 있었고, 사실 선조는 신성군을 제일 사랑했다고 한다. 삐뚤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광해군은 바른생활 사나이로 성장한다.
실록에서는 광해군이 세자가 되기 전까지 그 어떤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임진왜란 발발하기 1년 전에 송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건의하는 ‘세자 건저의 문제’(1591)를 일으키고, 기분이 상한 선조는 정철을 파직시킨다. 이때 동인에서는 송강 정철을 죽이자고 주장한 이산해의 북인과 살려는 주자라고 주장한 유성룡의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 상황을 광해군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였다. 당시 삼정승 중에서 두 명의 정승이 자신을 세자로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왕인 선조가 싫어한다는 것도 목격했다.
[세자 광해군]
자신보다 다른 아들을 더 사랑하는 선조에 대해서 광해군은 참고 인내하면서 지내는 동안에 임진왜란은 광해군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선조가 피난 중에 혹시라도 왕이 비는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18살인 광해군을 세자로 올리게 된다. (이때 반대의견을 낸 신하가 한 명도 없었다) 선조는 ‘분조’를 이뤄서 광해군에게 자신은 계속해서 도망을 칠테니 남아서 백성을 다독거리고 의병을 모으라고 한다. 이때 광해군은 적진 속을 누비면서 실추된 왕실의 위엄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광해군은 전쟁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칼 차고 전쟁에 참전한 왕은 태조 이성계와 정종 이방과와 광해군 세 명뿐이다. 사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조선 팔도를 돌아다닌 군주는 아마도 광해군이 유일할 것이다. 방계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선조는 이순신과 광해군에게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선조는 ‘양위 파동’을 일으키면서 신하들과 광해군을 힘들게 하였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사대책봉관계에 있었다. 명나라 황제의 임명장을 ‘고명’(誥命)이라고 하고 명나라 황제의 도장을 ‘금인’(金印)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까지도 광해군을 인정했는데, 당시 명나라 상황(장자가 아닌 셋째에게 황제를 물려주려는 것을 반대하던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이 꼬여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다(5번 거절했다). 광해군은 18살에 세자로 임명되어 34살까지 세자 생활을 하였다. 이후 광해군을 키워준 의인왕후가 죽자 선조는 51살이었는데 19세의 중전(인목대비)을 새로 맞아들인다. 광해군보다 7살이 어린 중전이 첫째 정명공주(1603~1685)를 낳는다. 곧바로 중전은 영창대군(1606~1614)을 낳는다. 신분상으로 광해군은 ‘군’이었는데 영창대군은 ‘대군’이었다. 서자 출신의 둘째 아들로 세자 자리를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데,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광해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과거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 내부에서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을 소북(유영경)이라고 하고 여전히 광해군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대북(정인홍, 이이첨)이었다.
[군주 광해군]
선조가 쓰러지고 (아직 영창대군이 2살 정도밖에 안되어서)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려고 할 때 (물론 유영경이 게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갑자기 건강을 회복한다. 다시 건강을 회복한 선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광해군을 모른척 하고 영창대군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바친 음식을 먹고 선조가 세상을 떠난다.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선조가 교지를 내렸을 것 같은데 유영경이 그것을 숨겼다고 한다. 이때 상황적으로 인목대비도 신하들이 모두 광해군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광해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광해군의 전후복구사업]
광해군의 업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전후복구사업이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끝나고 10년 뒤인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한다. 조선의 3대 궁궐이라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다. 전쟁이 끝나고 차마 경복궁은 중건하지 못하고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했는데 광해군 때 완성이 된다. 그리고 조선의 대비들이 쉬는 공간이었던 창경궁도 다시 복원한다. 그리고 경희궁도 다시 만들고 덕수궁도 살짝 손을 본다. 조선의 5대 궁궐 중에 4개를 광해군이 복원한 셈이다.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한다)
광해군은 사고(史庫)를 재정비한다. 조선 세종 때 4대 사고(춘추관, 전주, 성주, 충주)였는데, 모두 불타게 되는데 전주사고의 실록을 유생들이 내장산에 보관해 두었다. 광해군은 5대 사고로 확장하면서 혹시나 있을 전란에 대비해서 산에다가 실록을 보관하게 한다. 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적상산), 마니산(정족산)이다.
임진왜란 때 토지대장이 다 불타버렸기 때문에 광해군은 양전사업을 벌였다. 조선시대에 양전사업을 한 군주는 태종 이방원, 광해군, 흥선대원군이다. 광해군은 양전사업을 해서 토지대장 양안을 작성하고 호적을 재발급하고 호패법을 실시한다. 그리고 허준이 『동의보감』을 만드는 데 적극 지원하였다. 예전에 있었던 책을 다시 재편찬하기도 하였다(용비어천가,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도, 국조보감 등).
광해군의 업적 중에 눈여겨 볼 것은 1608년에 시행된 대동법이다.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의 폐단으로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관리가 대신 납부하겠다며 ‘대납’으로 변형되었고 이러한 공납의 폐단이 방납(防納-농민이 직접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함)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광해군은 1608년에 오리 이원익(1547~1634)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된다. (자본주의 맹아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대동법이다) 이때 쌀로 세금을 걷을 때 토지결수를 기준으로 걷게 된다(토지 1결당 12두).
[광해군의 중립외교]
임진왜란 이후에 만주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명나라를 위해서 조선도 출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서 양아치짓을 한 것을 직접 본 사람이다. 그리고 세자책봉을 5번이나 거절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도 있었을 것이고, 만약 명을 도왔을 때 후금이 조선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국 신하들이 강하게 주장해서 군대를 보내기로 했는데, 도원수 강홍립(1560~1627)에게 이길 것 같으면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여의치 않으면 눈치껏 항복하라고 전한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게 전시작전권까지 내어주었지만 광해군은 명나라를 도우러 파병하는 군대의 작전권을 명에게 주지 않았다(물론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게 패한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빠져있던 조선의 관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깨어있었던 군주가 광해군이었다고 본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려나고 훗날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고(1627), 존명배청 정책으로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게 된다.
세자로서는 역대급 활약을 했고, 전후복구에 열중한 군주였던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통해서 조선의 백성을 위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인조 반정 이후 인조의 후손들이 왕이 되면서 광해군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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