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8일 토요일

[조선27] 광해 폭군 주장에 대한 반박

[조선27] 광해 폭군 주장에 대한 반박

 

 

역사는 해석의 학문이다. 그리고 역사는 다수결의 학문은 아니다. 문헌 고증을 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광해군은 선조(재위 1567~1608)와 인조(재위 1623~1649) 사이를 다스렸던 군주이다. 광해군의 신원을 회복하지 않고 선조와 인조를 높이는 알량한 명분론으로 성리학적 가치관에 빠져있는 조선 후기는 그야말로 한심 그 자체였다.

 

인조의 후예가 조선의 왕들이 되면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에 대하여 재평가를 한 인물이 일본 역사학자이고 식민지사관을 퍼뜨린 이나바 이와키치(1876~1940)였다. 그는 왜 광해군을 재평가했을까? ‘이런 뛰어난 군주가 있었음에도 너희들은 광해군을 폭군 취급하지 않았냐? 이렇게 못난 사회였으니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도로 광해군을 재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이나바 이와키치의 제자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1896~1989)였다.

 

[광해군은 많은 사람을 죽였다?]

 

광해군이 자기가 죽이고 싶다고 신하 관료를 죄 없는데 죽인 적이 있을까? 자신과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는 상대를 대놓고 죽인 적이 있을까? 소북의 류영경(1550~1608)은 선조의 교지까지 숨겼던 놈이기에 오히려 살려두는 것이 이상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광해군 때 여러 가지 옥사가 있었다. 봉산옥사(1612), 계축옥사(1613), 신경희 옥사(1615), 허균 옥사(1618)는 광해군이 의도한 옥사는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왕족과 공신들을 많이 죽였다. 태종 이방원 역시 왕이 되기 위해 걸림돌은 다 제거하였다. 수양대군 세조도 무수히 많은 정적을 제거하였다. 중종 때에는 김공저 모반 사건, 이과 모반 사건, 진성군 사사, 신복의 옥사, 박영문 역모 사건, 기묘사회, 안처경 역모사건, 김광필 처형, 작서의 변, 경빈 박씨ㆍ복성군 사사, 이항 사사, 심정 사사, 김안로 사사 등으로 무수히 많은 신하들이 저세상으로 갔다. 광해군 때 옥사로 죽은 사람보다 선조 때 단 한번의 기축옥사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았다. 광해군의 옥사만 강조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계축옥사(폐모살제)]

 

인목대비를 폐비로 만들고 영창대군을 죽였던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서자이면서 둘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적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경우가 동서고금에 몇이나 될 것인가?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라고 하더라도 잠재적 경쟁자를 그냥 놔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광해군은 왕이 된 후에 5년간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았다. 영창대군이 9살에 죽었는데, 계축옥사(1613)는 광해군이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1568~1613)의 반역을 의도했다는 고변이 있었고, 김제남의 가족이 몰살당한다. 엄밀히 말하면 인목대비는 반역자의 딸이 되는 것이다. 중종 반정(1506) 당시에 중종의 아내였던 신수근의 딸에 대해서 신수근이 반역자이니 반역자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쫓아낸 적도 있다. 김제남이 죽었고 영창대군을 죽이라고 북인들이 상소를 올렸는데 광해군은 계속 그것을 막았다. 결국 마지못해 영창대군을 유배보낸다. 영창대군을 증살(불을 떼워서 죽임)했다는 것도 후대의 기록이다.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슬퍼하면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은 의인왕후(광해군을 키워준)의 묘소에 가서 저주하는 굿을 하기도 했다. 인목대비를 폐비로 만들라는 상소를 몇 년간 묵살하던 광해군은 인목대비가 서인들과 접촉할 것을 우려해서 덕수궁에 유폐시킨다.

 

[광해군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들]

 

광해군의 대동법이 광해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공납의 폐단인 방납을 막기위해 쌀로 세금을 걷자는 주장은 중종 때 조광조가 먼저 했다. 이런 수미법은 율곡 이이와 류성룡이 주장을 했다. 수미법이 곧 대동법이 된다. 광해군이 1608년에 왕이 되고 그 해에 대동법이 시행된다. 그것을 이원익이 건의했는데 이원익은 북인 정권도 아니었다(엄밀히 따지면 남인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에 대해서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건의를 수용한 것은 광해군이다. 이후 숙종 때에 가서야 잉류지역을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1708). 광해군은 아주 뛰어난 성군이거나 정치력이 뛰어난 군주는 아니었다.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이 시행되고 대동법으로 불만이 쌓인 지주들이 서인 출신의 기호학파였고 그들이 자기 재산 지키려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광해군이 궁궐 공사에 집착했다는 것은 다음 시간에)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조선31] 조선반란사 No.1 이괄의 난, 조선 역사에 이런 남성다움이 있었다.

[ 조선 31] 조선반란사 No.1 이괄의 난 , 조선 역사에 이런 남성다움이 있었다 .   1623 년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 이시언 모반사건 (1623) 유몽인 모반사건 (1623) 박홍구 모반사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