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2일 수요일

[대선특집1] 1대 대통령-1948년 이승만 당선

[대선특집1] 1대 대통령-1948년 이승만 당선

 

 

통일정부가 아닌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일은 1948815일이며 대통령은 이승만, 부통령은 이시영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가 제의되었을 때 대한민국의 우익은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고, 좌익은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하다가 나중에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혼란 상황 속에서 이승만이 정읍발언(1946)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단정론에 놀란 중도 좌파 여운형과 중도 우파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위를 속개하라고 주장하였다.

 

처음에 미군정은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면서 대통령은 김규식, 부통령은 여운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1947년에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과 소련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자기들의 거수집단이 되어 있던 UN에 한반도 문제를 넘겨버렸다. 194711UN 총회에서는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결정하였고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파견되어 남한에서 인구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구가 부족한 북쪽에서 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19482월에 UN소총회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510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미 여운형은 암살당하였고(1947.7.19), 남한쪽의 지도자였던 김구과 김규식이 단독 선거를 막아보려고 북한으로 넘어가서 김일성을 만나게 된다. 이때 남한의 우익 세력이 김구를 비판하였고, 이때 김구는 3천 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당시 남북협상운동(1948)은 남한에서 선거 분위기가 무르익는 4월에 시행되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띄우기 위한 작업에 김구와 김규식이 들러리를 서게 된 것 같은 결과를 낳았다.

 

제헌국회의원 선거(1948510)

 

어쨌든 510일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남녀평등에 입각한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당시 총선에서 선출되는 국회의원은 임기가 2년이었다. 선거구가 200곳이었는데 제주도에서는 43항쟁(1948.4.3~1954.9)이 한창이어서 2곳의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이 선거에 김구와 김규식 계열,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이 불참하였다. 그래도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95%가 선거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막상 선거의 결과에서는 젊은 소장파 무소속 출신이 가장 많이 당선되었다. (이 결과를 놓고 본다면 차라리 소련과 북측이 인구비례를 통한 국회의원 선거를 받아들였다면 극과나 극우가 아닌 중도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헌의회 의석수와 득표수(1948.5.10), 임기 2

정당

의석수

무소속

85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 이승만 계열)

55

한국민주당(김성수)

29

대동청년당

12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이범석 계열)

6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

대한노동총연맹

1

기타

10

합계

200

 

연장자인 이승만이 국회의장이 되었고, 실제로 국회의장 선거에서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제헌의회가 717일에 헌법을 제정하여 발표하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부통령 이시영

 

정치체제를 내각책임제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고집하였다(4년 중임제 주장). 이때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당시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국회의원들의 선거는 720일에 비밀투표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1대 대통령 투표(총 투표수 196, 당선정족수 131)

이름

나이

정당

득표수

득표율

결과

이승만

74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80

91.8%

당선

김구

73

한국독립당

13

6.63%

 

안재홍

58

무소속

2

1.02%

 

서재필

85

?

1

0.51%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13표가 나왔다.

서재필은 당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서 피선거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1대 부통령 1차 투표(총 투표수 197, 당선정족수 132)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이시영

독촉

113

57.36%

김구

한국독립당

65

32.99%

조만식

조선민주당

10

5.08%

오세창

무소속

5

2.54%

장택상

청구회

3

1.52%

서상일

한국민주당

1

0.51%

 

이승만의 의중은 이시영이나 조만식에게 있었다고 한다. 조만식은 당시에 북한에 있었는데, 만약 조만식이 부통령이 된다면 나름 이승만은 남북을 아우르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선정족수가 나오지 않아서 부통령은 2차 투표에 돌입하였다.

 

대한민국 1대 부통령 2차 투표(총 투표수 197, 당선정족수 132)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이시영

독촉

133

67.51%

김구

한국독립당

62

31.47%

이구수

무소속

1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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