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28] 광해군 궁궐병? (feat.조선궁궐 총정리)
조선의 3대 궁궐과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조선의 3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었다. 경복궁은 무학대사가 자리를 잡고 정도전이 방향을 설정한 궁으로 태조 이성계가 만든 궁이었는데, 조선의 왕이 공식적으로 활동하며 일상생활을 하던 으뜸 궁궐인 정궁(正宮)이었다. 왕이 정궁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서 만든 제2의 궁궐(이궁, 離宮)이 태종 이방원 때 만들어진 창덕궁이었다. 조선 성종 때 왕실의 어른들이나 대비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창경궁을 만들었다. 이 세 궁궐이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경복궁은 왕이 피난을 가게되자 백성들이 불태운 것 같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은 일본군이 한양에서 후퇴할 때 불태운 것 같다.
조선의 궁궐을 복원하려고 노력한 광해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것이 덕수궁이다. 선조는 경복궁은 다시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창덕궁을 복원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광해군 2년차에 완성이 되었다. 광해군은 창덕궁 완성 이후에 창경궁에 대한 공사를 서두른다.
광해군이 비판을 받아도 할 말 없는 것이 경희궁 공사였다. 훗날 인조의 아버지가 되는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정원군의 집을 밀어버리고 거기에 경희궁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경희궁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이것 때문에 민생이 파탄났다는 것은 솔직히 코메디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법궁(정궁)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복궁은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안좋다고 한다. 그래서 광해군은 다른 법궁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것이 인경궁이다. (이게 그렇게 잘못된 공사라고 비판을 했다면 다음 임금인 인조는 왜 인경궁 공사를 계속하려고 했을까?)
광해군은 황제만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원구단’을 만들려고 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원구단’ 만들었던 인물이 수양대군 세조였다. (물론 만든 뒤에 바로 꼬리를 내렸지만) 그리고 대한제국의 고종이 원구단을 만든다. 이제 강점기 때 원구단을 밀어버리고 오늘날 그 자리에 ‘웨스턴조선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 조선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경운궁)이다. 이들 중에 경복궁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궁궐은 광해군이 완성했거나 복원한 건물이다.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해야 하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인조 반정 이후에 쓰여진 ‘광해군일기’는 과연 객관적으로 쓰여졌을까?
광해군 이후 조선은 사대주의에 더욱 빠지면서 ‘만동묘’(명나라 신종 만력제를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를 만들고, 대보단(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던 제단) 등을 만들고 ‘조종암’(숭명배청을 의미하는 25자를 새겨놓은 암벽과 비석) 등을 만들면서 스스로 자존심을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하는 것은 인조반정 이후의 역사를 정통이라고 말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광해군은 폭군은 아니다. 그러나 성군은 아니었고, 정치력 또한 뛰어나지는 못했다. 북인들에게 의지했고 북인 중에서 이이첨(1560~1623)이라는 작자가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김개시(상궁 김씨, ?~1623)라는 여인의 말을 많이 믿었던 측면이 있다. 인조 반정 이전에 반란의 조짐이 있었다. 광해군은 이귀(1557~1633)의 반란이 있을 거라는 보고에 대해서 더 이상 반란으로 내몰아 신하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광해군이 폭군이었다면 인조반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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