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30] 인조 정권의 대환장 파티와 치열했던 광해 복위 운동
단종 복위에 대한 기록은 많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숙종 때 단종의 신원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원이 회복되지 않아서 광해군을 복위하려는 운동은 역사 속에서 묻혀버렸다.
인조반정으로 죽어나간 북인들 :
- 처형 100여 명 처형(정형으로 목이 잘린 사람이 38명, 복주 사약먹고 죽은 사람이 59명)
- 유배 300명
- 삭탈관직 100명
인조반정의 주역들
- 능양군
- 1등공신 : 이서, 신경진 - 김류 vs 이귀(김자점, 최명길, 심기원), 이흥립
- 2등공신 : 이괄
신경진은 신립 장군의 아들이고 김류는 김여물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두 사람(신립, 김여물)의 아들들이 인조반정에 등장한다. 이귀는 서인의 영수급 인물이었지만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이서, 신경진, 김류, 이귀는 각각 400명의 호위병을 거느린다. 이후 조선의 5군영 체제는 여기에서 출발하는데 5군영의 총대장은 왕이 아니라 서인들이 임명하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에 군권을 신하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런 5군영에 저항하기 위해서 정조가 ‘장용영’을 만든 것이다.
이들 중에서 심기원이 반역을 일으켰다고 해서 김자점에 의해서 죽게 되는데, 김자점 역시 효종 때 청에게 밀서를 보내다 발각되어 유배 중, 역모에 연루되어 죽게 된다. 그리고 이흥립은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났을 때 이괄의 편에 서게 된다(후에 자결함). 결과론적으로 1등 공신 중의 세 명이 인조에게 칼을 들이댄 사람이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주화파’(主和派)의 대명사가 된다. 이후 김류와 이귀는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유행한 시 : 상시가(傷時歌)
嗟爾勳臣(차이훈신) 아, 너희 훈신들이여
毋庸自誇(무용자과) 잘난 척하지 말라
爰處其窓(원처기실) 그들의 집에 살고
乃占其田(내점기전)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
且乘其馬(차승기마) 그들의 말을 타며
又行其事(우행기사) 그들의 일을 행하니
爾與其人(우여기인) 너희들과 그들이
顧何異哉(고하이재)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
광해군 복위 운동
- 이시언의 난(1623) : 이시언(1557~1624)은 광해군을 복위하려고 의병을 모집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혔는데,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시언이 이괄의 편을 들 수 있다고 생각되어 제거되었다.
- 유몽인과 이들 유악의 난(1623) : 유몽인은 『어우야담』으로 유명하다. 이순신이 아꼈던 순천부사 권준을 파직시킨 인물이다. 그는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서 유배생활을 했지만 인조반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상부탄』이라는 시를 짓는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 데 무궁화꽃 같은 멋진 남자라네.” 이후 유몽인의 아들 유악이 폐세자 이질(1598~1623)을 만나러 강화도로 간다. 폐세자가 유배지에서 땅굴을 파서 나갔다가 잡힌다. 인조는 폐세자에게 사약을 내린다.
- 박홍구와 정문부의 난(1624) : 임진왜란 때 함경도를 지킨 영웅 정문부는 박홍구 역모사건(1624)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풀려났고, 훗날 이괄의 난(1624)에 연루되어 고문사 당했다.
- 유효립과 인성군의 난(1628) : 이 때는 광해군의 친필 편지까지 발견된다. 광해군의 동생뻘인 인성군을 옹립하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였다. 인조는 직접 인성군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광해군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직접 죽이라는 말은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광해군과 15, 16, 17, 18
- 15년 : 왕
- 16년 : 세자
- 17년 : 왕자
- 18년 :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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