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29] 인조반정, 조선의 역사를 바꾸다. 최악으로 (26분 순삭ver.)
인조반정, 과연 바르게 돌린 사건인가?
반정(反正)은 바르게 돌린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종반정(1506)과 인조반정(1623)이 있었다. 중종반정은 이후 중종이 왕이 되어 별로 한 것이 없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을 막아낸 것이기에 ‘반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조반정은 ‘바르게 되돌렸는가’ 아니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렸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중종반정에서 중종은 쿠데타의 주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에서 훗날 인조(1623~1649)가 되는 능양군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능양군의 아버지 정원군은 능창군이 역모죄에 걸려서 유배갔다가 자살한 뒤에 홧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정원군의 집이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고 해서 헐리기도 했다.
인조반정 일어나다
능양군은 조정과 백성이 광해군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문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광해군과 척을 지고 있던 서인과 남인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고, 광해군의 지지세력이었던 북인의 이이첨도 사림이었기 때문에 후금과 대화하려는 광해군에게 반대를 하게 된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실리를 주장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었다. 백성들은 왕의 깊은 뜻을 모르고 있었다.
능양군이 주도하고 김류(1580~1619)를 사령관으로 해서 이귀(1557~1633), 김자점(1588~1652) 등이 주도한다. 이귀가 착호군(捉虎軍, 호랑이를 잡는 부대)을 거느리고 반란을 주도한다. 이것이 미리 광해군에게 고변으로 알려졌지만 광해군이 더 이상 옥사를 통해서 신하를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이귀를 취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최순실 같은 김개시(상궁 김씨, ?~1623)라는 여인에게 김자점이 뇌물을 주었다. 김개시가 ‘설마 이귀가 그랬을리 없다’고 변호하였다.
500~1,000명 정도 모였다. 이들이 한양 도성의 북문인 창의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을 향했는데 창덕궁의 문은 돈화문이었다. 왕을 지키는 3천명 정도의 최정예부대는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이었다. 이 훈련도감의 사령관도 반란군과 한패가 된다. 광해군은 반란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대북 이이첨의 소행인가’ 의심했다고 한다. (이것이 광해군의 정치적 한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덕수궁에 있던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이려고 하지만 한때 신하였던 사림들은 광해군을 죽이는 것은 반대했다.
반정의 명분은 무엇인가?
1. 명과의 의리를 저버렸다.
이후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다가 ‘정묘호란’(1627)을 겪기도 한다. 그 이후 한술 더 떠서 ‘존명배청’을 주장하다가 ‘병자호란’(1636)으로 털리기도 한다. 오랑캐와 협력하려고 했다고 왕을 몰아낼 사람들이 자신들은 정작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2. 폐륜을 저질렀다.
폐모살제(廢母殺弟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라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비판한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1612~1645), 며느리 민회빈 강씨(1611~1646), 손자 경선군 이석철(1636~1648), 경완군 이석린(1640~1648) 등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
3. 무리한 궁궐 증축
인조도 쿠데타하고 궁궐 공사 계속 하고 싶어했다.
인조반정, 조선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다
인조반정 이후에 누가 1등공신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다가 이괄의 난(1624)도 일어나고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공주까지 도망가는 상황도 연출된다.
이후 광해군의 신원이 회복되지 않았던 이유는 정원군과 인조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 내내 왕을 했기 때문이다. 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임진왜란이 아니라 인조반정을 전후로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인조반정 이후에 성리학적 명분론이 절대적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혁명파 사대부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고, 그들이 주도하던 15세기에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유연함이 있었고, 부국강병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려말 온건파 사대부(사림)들이 16세기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16세기 기술문화가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훈구파는 자연 도태가 되고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그나마 진보적이었던 북인이 제거되는 정치싸움
사림 중에 진보적이었던 동인은 송강 정철이 세자 건저의 문제(1591)로 곤경에 처했을 때 정철을 죽이자는 북인과 살려두자는 남인으로 쪼개진다. 북인의 학문적 스승은 조식(1501~1572)과 서경덕(1489~1546)이었다.
浴川(욕천)-曺植(조식) / 냇물에 몸씻기-曺植(조식)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은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 천석 맑은 못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 티끌이 만약 오장에 생겨 있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 비금 바로 배를 갈라 저 물에 띄워 보내리.
조식의 제자이자 사위가 곽재우(1552~1617), 정인홍(1535~1623)이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에서 그나마 이이첨이라는 사람은 쓰레기였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남인은 이언적(1491~1553)과 이황(1502~1571)의 제자들이어서 오로지 이(理)에 집중하였다. 그나마 북인이 ‘기’(氣)도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한 명을 몰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북인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였다고 할 수 있다. 북인들이 회퇴변척(晦退辨斥)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언적과 이황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광해군이 외교를 얼마나 잘했는지에 대해서는 광해군이 몰아냈을 때 명나라가 오히려 광해군을 지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덕분에 조선의 수군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고, 수군이 없던 후금이 조선과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나라는 새롭게 조선의 왕이된 인조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식민사관에 저항하기 위해서 인조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학자들이 있고 그들에 의해서 광해군이 폭군으로 강조되는 어이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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