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1탄] 아프가니스탄이 시끄러운 본질적인 이유 (22분 순삭 Ver.) #167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려면 국제적으로 여러 나라들이 엮여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효기심 : 아프가니스탄 1편]
아프가니스탄은 고대 중세까지만해도 민족국가가 없었다. 수많은 역사와 사건 사고를 거치면서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아프가니스탄은 1700년대까지도 민족이 통합되지 않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지역은 수많은 이민족이나 강대국들이 쳐들어오기 딱 좋은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때문에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에는 굉장히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문제는 이 민족들이 오늘날까지도 별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 아프간족(파슈툰족) : 42%
- 타지크족 : 27%
- 하자라족 : 9%
- 우즈벡족 : 9%
- 그 외 : 13%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여러 나라들이 존재하는데 거의 대부분 ‘스탄’이라는 글자가 뒤에 붙어 있다. 여기에서 ‘스탄’이라는 글자는 페프시아어로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아르메니아(하얀스탄)
파슈툰족이 페르시아어로 아프간이라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파슈툰족의 땅, 아프간족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아프가니스탄이 된 것이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헌법에는 민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민족을 ‘아프간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프간 민족국가의 등장
1747년 두라니 제국이라는 아프간족(파슈툰족) 민족국가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에 아프간에는 외세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존재하고 있다. 해외 봉사 단체가 아프간에 봉사를 하러 가도 호의적이지 않은 실정이다. 외세에 대한 반감에다가 내부적으로 민족들끼리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9%를 차지하는 하자라인은 아프가니스탄 안에서 심판 핍박을 받고 있던 민족이었다.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반감 중에서 특히나 몽골에 대한 반감이 심한데, 몽골계와 외모가 비슷한 하자라족들이 핍박을 받아온 것이다. 게다가 하자라족은 아프간의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 이슬람 수니파가 아니라 이란이 많이 믿는 시아파를 믿고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레반 보다 우선 아프가니스탄이 역사적 문좌적으로 다양한 민족들끼리 사이가 나쁜 지역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같은 민족들끼리도 부족과 가문이 다를 경우에 싸우기도 한다. 같은 민족이라도 가문이 다르면 서로 정치권력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목국가들의 근대화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생긴 약탈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세 가지 특징(외세에 대한 반감, 민족간 갈등, 부족간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의 접근
러시아는 중세 근대까지도 유럽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유럽으로는 확장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하였는데, 영국은 당시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인도 코 앞까지 러시아가 기어내려오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먼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손을 뻗었고, 영국도 아프가니스탄과 친하게 지내려고 작업을 걸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먼저 손을 뻗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낸다. 이에 영국은 퇴위당한 왕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이렇게 영국은 이전 왕을 앞세워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1842)이었다.
영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영국이 세운 왕이 걸림돌이 되었다. 원래 외세를 싫어하던 아프간 국민들의 눈에 외세의 힘을 빌어서 왕이 된 왕을 별로 곱게 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외세에 대한 반감과 자기들이 왕을 해먹고 싶은 생각에 내란 쿠데타로 혼란을 겪게 된다. 영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이후 러시아는 1877년까지 꾸준히 현재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손에 넣는다. 영국을 쫓아낸 아프간은 러시아는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입장에서는 영국은 섬나라였고, 러시아는 커다란 대국으로 보였던 것 같다. 이때 러시아는 외교간을 일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다.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단 전쟁(1878~188이 발발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파키스탄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대신에 영국의 입맛에 맞게 하기 위해서 외교에 간섭하겠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러시아 모두의 입장을 대변한 ‘와칸 회랑’(Wkakan Corrikord)이라는 국경이 만들어진다. 당시 아프간 왕(압두르 라만 칸)은 러시아와 영국이 원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와칸 회랑은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역으로 활용되었다.
내전으로 얼룩진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외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애 내전에 바빴기 때문에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무조건 중립을 선언한다. 그런데 1차 대전 때 독일이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독일은 아프간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주면서 영국령 인도를 쳐들어가서 이익을 얻으라고 꼬신 것이다. 현명한 아프간 왕은 군사적 지원은 다 받고서 정작 인도로 쳐들어가지는 않는 ‘먹튀’를 시전한다. 그런데 특정 세력이 나서서 왕이 영국편을 들어서 영국령 인도를 쳐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다 끝난 시점에서 당시 아프간 왕(하비불라 칸, Habibullah Khan)이 암살을 당한다. 왕이 암살당한 1919년에는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주 짧게 있었지만 이후 1970년까지 50년 동안 아프간은 더 이상 외세와 엮인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며 평화를 누리는 듯 했다. 그런데 외세만 없었을 뿐 1928년부터 부족들이 서로 치고받는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외세가 들어오면 외세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자기들이 왕을 해먹으려는 정치군들도 많이 있어왔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 바로 옆에 1947년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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