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6] 일본 전국시대 전쟁사 (5)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식을 죽이는 자가 나타날까 두려웠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장 큰 번주로 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5대로(五大老) - 1598년 9월 18일
- 히데요리를 보좌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5명의 유력 다이묘가 정무를 대신하는 제도. 이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도쿠가와 이에야스(250만석)우키타 히데이에(57만석) : 양자, 임진왜란 총사령관모리 데루모토(120만석) : 모리 가문의 수장. 투항 후 키코쿠 큐수 정벌. 임진왜란 출정마에다 토시이에(100만석) :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구우에스키 가게카츠(120만석) : 우에스기 겐신의 아들
세키가하라 전투
- 서군 12만 5천 vs 동군 7~8만
- 병력도 많고 포진도 우세했던 서군... 그러나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었던 세키가하라 전투...
1. 가토 기요마사 : 반 미쓰나리를 외치다
- 미쓰나리의 지위 : 문관 출신, 관료 中 최고 위치
- 가토 기요마사와 미쓰나리의 갈등 : 임진왜란 당시에 한양 점령 시기를 밝혀내 갈등이 시작됨
- 가쓰이에 사후 미쓰나리 암살 모의 : 미쓰나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갈등을 중재함
- 이에야스가 미쓰나리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미쓰나리가 기요마사보다 견제가 쉬웠기 때문
- 가토 기요마사를 포섭함으로 전선을 바꿔버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이에야스 vs 반 이에야스’가 아닌 ‘미쓰나리 vs 반미쓰나리’로
- ‘토요토미 히데요시 vs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닌 ‘간신 문신 vs 충신 무장’으로 바꿈
- 세키가하라 전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쓰나리의 실책이다. 만약 데려갔으면 대놓고 배신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 몸은 서군, 마음은 동군
- 정유재란 때 총사령관이었다.
- 울산성 전투 때 가토 기요마사를 구하러 갔다. 그런데 ‘총대장이 경솔하게 울산성을 구하러 갔다’는 미쓰나리의 보고로 영지를 몰수당할 뻔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원으로 은혜를 입었다.
- 미쓰나리는 서신을 보냈는데, 도쿠가와는 대포를 쏘았다. 대포를 맞은 고바야카와는 서군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고, 고바야카와를 막던 오오라니 요시쓰구는 할복한다.
3. 와키자카 야스하루
- 행주산성에서 총대장이었던 미쓰나리의 허술한 병법을 목격했을 것이다.
- 전투 지휘에 취약했던 미쓰나리 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듯...
4. 모리 데루모토
- 이시다 미쓰나리가 모리에게 총사령관을 맡겼고, 모리는 자신이 아닌 삼촌(모리 히데모토)을 보냈다.
- 모리가 도쿠가와에게 쳐들어가려고 할 때, 앞에 있던 부장인 킷카와 히로이세가 모리를 막았다.
- 싸우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자신이 임명한 부하가 막은 건 짜고 치는 고스톱?
5. 시마즈 요시히로
- 도요토미에게 패한 후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봐줘서 목숨을 건진다.
- 의리 때문에 참전했지만 달랑 1,500명을 데리고 참전했다.
- 야습하자는 말을 미쓰나리가 씹었고, 후에 미쓰나리기 도와달라고 하자 전령이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거절한다.
- 적군을 향한 시마즈의 퇴각은 적군을 당황시켰다. 조카(시마즈 토요히사)가 가케무샤를 자처했고, 퇴각하면서 추격하는 적을 100명씩 남아서 상대하는 전법으로 80명이 살아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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