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6] 일본 전국시대 전쟁사 (1) 전국시대의 시작과 오다 가의 상경
동양 사학자 ‘나이토 토라지로’
“생각하건대, 오늘날의 일본을 파악하기 위해서 일본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고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오닌의 난 이전에 일어난 일은 외국 역사와 비슷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반면, 그 이후의 일은 우리들의 진정한 신체 곳곳에 맞닿아있는 역사라서 그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으면 그걸로 일본 역사는 충분히 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 전국시대 역사를 알면 일본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막부체제란
- 천황 - 쇼군 - 다이묘 - 무사 - 농민/상인/수공업자
- 쇼군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고 불렸는데, 일본 무신 정권의 지배자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원래 군사와 관련한 임시직이었으나, 무신정권 등장으로 인해 최고위관직으로 변경되었다.
- 다이묘는 쇼군에게 충성과 복종을 하는 대신에 토지를 하사받고 조세징수권과 징병권을 허락받았다.
전국시대의 시작은 오닌의 난(1467~1477)로부터 시작된다.
-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1436~1490, 재위 1449~1473)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승려였던 동생 요시미(1439~1491)를 환속시켜서 후계자로 지명하였다(1464년). 그런데 1465년 아내 도미코가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았다. 아내 도미코는 요시히사가 쇼군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정권의 실력자인 야마나 소젠에게 협력을 부탁했고, 요시미는 간레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손을 잡았다. 이로써 후계자를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오닌의 난이 일어난다.
- 오닌의 난을 통해서 다이묘(번주)의 성격이 변하였다. 이 전에는 수고(守護) 다이묘(중앙정부에 의해 임명된 지방관)였지만, 점차 ‘지역의 실세’가 스스로 힘을 얻어 다이묘가 되는 센코구(戰國) 다이묘가 등장하시 시작하였다. 센코쿠 시대가 되면서 점차 쇼군에 대한 충성도가 약해지면서 하극상의 시대가 되었다.
전국시대 유력한 가문(1570년 경)
- 서부지역 : 모리 가문(여기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수상이 나왔다), 시마즈 가문☞ 모리 가문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조슈번,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번이다.
- 중부지역 : 오다 가문, 도쿠가와 가문, 아자이 가문, 아사쿠라 가문, 미요시 가문(쇼군)
- 동부지역 : 다케다 가문, 우에스기 가문, 호죠 가문
울지 않는 새가 있다면?
- 오다 노부나가(1534~1582) : “당장 죽이고 우는 새를 다시 마련하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 : “어떤 방법을 써서든 울게 하리라”
-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 : “그 새가 울기를 기다리겠다.”
다이묘의 꿈 : 상락(上洛)
-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목표는 ‘교토 상락, 새 막부 설립’이었다. 마치 삼국지의 조조가 ‘협천자 영제후’를 했듯이 쇼군을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이다.
오다 가문의 상락
- 오다 노부나가의 근거지는 ‘오와리 국’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근거지는 ‘미카와 국’이었으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근거지는 ‘스루가 국’이었다.
- 오다 가문은 상락을 하기 전에 후방을 든든히 하기 위해서 미카와 국을 침공하였다. 이때 미카와 국은 스루가 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 스루가국은 미카와 국의 도움을 받아들이면서 인질을 요청하였다. 이때 미카와 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보내려고 하였다.
- 그런데 오다의 아버지가 인질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납치하였다.
- 이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오다와 도쿠가와의 관계는 혈맹과 같은 관계가 된다.
- 오다의 아버지가 죽자 미카와와 스루가 국이 연합하여 오와리로 쳐들어간다.
-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가문이 오와리 국을 공격하였을 때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1560)에서 예상을 뒤엎고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기존 정설은 ‘우에노 가도’를 통한 우회 진격이라고 하지만 최근에는 정면돌격을 하였다고도 함)
- 오다 노부나가는 기요스 동맹(1562)을 체결하면서,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이에야스의 장남 도쿠가와 노부야스를 결혼시켜서 동맹을 체결한다.
- 상락에 대한 명분은 의외로 막부쪽에서 던져주었다. 당시 11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1495~1508)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12대 쇼군이 되었다. 13대 쇼군은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테루였는데, 쇼군 권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으나 에이로쿠의 변(1565년), 아시카가 요시히데(요시즈미의 차남 아시카가 요시쓰나의 아들)를 앞세운 모반이 일어난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으로 용맹하게 싸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 14대 쇼군은 아시카가 요시히데였는데 중병에 걸리자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옹립되어 1568년 9월 요시히데를 몰아내고 15대 쇼군으로 오른다.
오다 가문의 일본 정벌기
- 15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쇼군이 되었는데 자신이 오다의 꼭두각시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오다를 제거하라는 밀지를 보낸다.
- 오다 노부나가는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명령한다. 이때 아사쿠라 가문은 그 명령을 거부한다.
-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가문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는데, 처남인 아자이 가문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한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 오이치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이었다.
- 자존심과 체면을 구긴 오다 노부나가에게 정토진종(대승불교를 주장하는 정토종의 한 종파로, 가마쿠가 막부 당시 형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비승비속의 불교)의 혼간지도 오다 노부나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오사카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기독교 종파를 허용했기 때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 오다에 대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미요시(쇼군), 아사쿠라, 아자이, 정토진종 등의 세력이 연합되어 오다를 포위하였고, 이때 동쪽의 다케다 신겐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