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6] 일본 전국시대 전쟁사 (2) 미타가하라 전투와 다케다 신겐
다케다 신겐(1521~1573)
- “새가 울지 않으면 않는 대로, 울면 우는 대로 놔둔다.”
이마가와 가문의 쇠퇴
- 도쿠가와 가문과 연합하여 오다 가문을 공격했던 이마가와 가문은 56대 천황의 후손으로 전국시대 당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가문이었다. 그런데 오다의 공격으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당시 아자이 가문의 정략결혼
-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과 결혼
-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장녀 결혼시킴
- 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야스의 3남)과 3녀 결혼시킴
다케다 신겐의 상경
- 총 병력 3만으로 구성하여 3개군으로 나누어 미카와(도쿠가와 이에야스)ㆍ오와리(오다 노부나가) 점령을 시도하였다.
- 젊은 명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시에 아자이-아사쿠라의 연합군과 전투할 당시에 아사쿠라 군을 격파하고 아자이 군에게 고전하던 오다를 도운 전력이 있다.
- 다케다와 대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 학익진을 펼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 다케다는 어린진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산간지역의 기마부대로 학익진의 중심을 뚤어버렸다.
- 도쿠가와는 당시에 22,000명을 11,000명으로 포위하는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 전투 시작 2시간 뒤에 약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나에게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옛날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나는 그에게 패배하고 도망가며 말 위에서 변을 지릴 정도였다. 정말 존경하면서도 무서운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 전투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배웠다. 그때의 패배가 내 인생에 얼마나 큰 교훈이 되었는지모른다. 다케다 신겐, 그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 다케다 신겐은 이후 아사쿠라 가문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오다를 쳐들어가자고 했지만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눈이 많이왔다는 핑계로 거절하였고, 이후 다케다 신겐은 본거지로 돌아간다.
아자이, 아사쿠라 가문을 정벌하는 오다 노부나가
- 오다는 이후 정토진종과 화해를 하고 도쿠가와와 협력하여 아사쿠라, 아자이를 공격한다.
-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아사쿠라 가문을 정벌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이치는 자결을 결심하지만 부하(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류로 실패한다. 아자이의 영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주어진다.
- 이때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자이 히사마사(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버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해골에 금을 입혀서 술잔으로 사용한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갈등
- 오다 노부나가의 딸이 오다에게 편지를 써서 ‘남편과 시어머니가 수상하다’고 전한다.
- 다케다 신겐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의심을 사서 오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도쿠가와 노부야스와 아내 쓰끼야 마도노(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를 처형하라고 요구한다.
- 결국 도쿠가와 노부야스는 할복하고, 아내는 간접 처형된다.
다케다 신겐이 기마대를 키울 수 있던 이유
- 많은 초지
- 금광 개발
다케다 신겐이 오다를 이길 수 없었던 이유
- 다케다 신겐이 오다를 이길 수 없었던 이유는 지역 차이에 따른 경제력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신겐공은 단 한 번도 적을 영내에 들인 적이 없으며, 늘 쳐들어가서 적과 싸웠다.”
- 영토 대부분이 산악지대였으며 곡식 산출량이 적었다. 반면 오다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노비(濃尾)평야였다. 오다는 전국시대 당시에 일본의 최고 평야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관동평야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다. 이곳은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개발한다).
다케다 신겐의 전술 지침으로 유명한 ‘풍림화산(風林火山)’
-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조용하기는 숲과 같으며, 몰아치기는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산과 같다.”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은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 두 사람은 북시나노 영지를 두고 다섯차례 전투를 벌인다(가와나카지마 전투).
- 우에스기 겐신, “신겐과 활과 칼로 싸우고 싶지 소금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은 의리가 있는 무사이다. 내가 죽거든 그와 화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영토를 보존할 수 있다.”
- 우에스기 겐신의 전법은 ‘구루마가카리’라는 전법이었는데, 부대를 원 형태로 배치하여 돌아가면서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다케다 신겐은 후에 지병 악화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오다 노부나가는 사흘 밤낮을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