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8-2] 연산군 (2) 패륜
여색을 밝히는 데에는 세계 어떤 폭군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조선의 풀한포기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연산군은 ‘채홍사’라는 관리직을 만든다. 채홍사는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인물이 좋은 처녀들을 연산군에게 데리고 오는 임무를 맡았다. 곧 조선의 여인들이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1505년에 채홍사를 전국 각지에 보낸다.
채홍사들이 데리고 온 여인들은 ‘운평’이라고 한다. 이들은 음주가무와 잠자리 교육을 받다가 왕을 쾌락의 세계로 안내하면 ‘천과흥청’이라고 하고, 그냥 잠자리만 같이하면 ‘반과흥청’이라고 하고, 왕과의 잠자리를 대기하고 있으면 ‘지과흥청’이라고 했다. 한양에서 운평이 거의 1만 명 정도 음주가무와 잠자리 교육을 하는 것에 대해서 성균관 유생들이 투서를 날리자 성균관 유생들을 쫓아버린다. 그리고 흥청들을 성균관으로 부른다. 원각사 스님들을 쫓아버리고 그곳에서 흥청들과 놀기도 한다. 오죽하면 ‘성균관’이 ‘놀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천과흥청의 가족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천과흥청의 가족은 지방에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흥청들은 연산군을 쾌락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아마도 연산군은 ‘성도착증 환자’였을 것이다. 궁궐에서 즉각적으로 거사를 치루는 것을 위해 신하들이 연산을 둘러싸기도 했고, 사냥을 나갈 때에도 임시로 거사를 치룰 수 있는 가마(거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조선의 관료들에게 가마를 들게 한다.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불러들인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때 존속살해까지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친모가 아닌 계모도 어머니로 인정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계모도 죽여버린다.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죽었다고 생각한 연산군은 그들을 두들겨 팼다. 그들을 멍석을 말아놓고 그들의 아들들에게 몽둥이로 내려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귀인 엄씨와 정씨의 시신을 잘라서 팔도에 보내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 때부터 왕을 모셨던 김처선(1421~1505)이라는 내시가 연산에게 바른 말을 했다가 죽임을 당한다. 당시 백성들이 왕에 대한 잘못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한글 사용을 금하는 ‘언문 사용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급기야 신하들은 다른 곳에서 쿠데타(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연산군은 근친상간까지 자행한다. 자신을 사가에서 키워준 월산대군의 부인(연산군의 큰엄마)을 겁탈하기까지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월산대군 부인과 연산군의 근친상간은 왜곡된 내용일 수 있다) 월산대군 부인이 자결했고, 월산대군 부인의 오라비가 박원종이고, 성희안과 함께 반정을 일으킨다(중종반정, 1506). 강화도로 유배간 지 두 달 만에 연산군은 죽는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만 남고 연산의 가족은 다 죽었고, 후에 연산군은 부인 신씨 곁에 묻힌다.
강력한 왕권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더라면 멋진 군주가 될 수 있었는데, 그걸 잘못 사용하면서 이후 조선의 왕권은 형편없이 약해진다. 후에 중종반정 때 중종의 아내인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그래서 중종의 아내는 쫓겨난다. 부인 신씨는 경복궁 옆의 인왕산 치마바위에 걸고 중종은 그것을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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