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윤의 지식Play] 소련을 붕괴시키고 미국 보수의 역사가 되다, 레이건 대통령 일대기! | 미국사, 냉전, 소련 해체, 신자유주의, 공산주의
많은 사람들이 현대 보수의 아버지 하면 미국의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떠올린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 출신이었는데 사실 A급 배우는 아니고 B급 배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Screen Actors' Guild’(미국의 영화 및 텔레비전 배우 노동 조합)의 위원장을 지낼 만큼 사회적인 이슈라든지 배우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레이건과 그의 아내 낸시 레이건]
영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도 배우 출신이었다. 1949년 레이건 대통령이 전미 배우 조합의 위원장을 지내고 있을 당시에 미국 전역에 ‘Red Scare’라는 적색공포와 매카시즘이 막 불기 시작할 때였다. 적색공포는 1917~1920년과 1946~1957년 두 차례에 걸친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비미국적 사상에 대한 국민적 히스테리 증상이었는데 당시 매카시즘의 열풍으로 반공산주의가 만연하였고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데 열풍이 불었다.
당시 할리우드에도 공산주의 영향을 배우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동화가 된 사람들 이름을 적어놓은 리스트가 있었다. 당시에 낸시 데이비스란 여성이 조합위원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에 관심도 없고 싫어하는 사람인데 자기하고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공산주의 사상에 동화된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부탁한다. 레이건은 낸시 데이비스라는 여성의 이름을 블랙 리스트에서 빼주었고, 이후 3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후 두 사람은 천생연분으로 해로한다. 레이건은 낸시가 없었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고(All would be without meaning if I didn't have you), 낸시는 자신의 진짜 인생은 레이건을 만나고 시작되었다고 말했다(My life didn't really begin until I met Ronnie).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레이건 대통령은 보수 그리고 공화당의 정신적인 지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원래 레이건은 민주당원이었다. 1950년대에는 민주당원으로서의 당적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1954년에 GE Theater라는 라디오 프로그램(General Electric Theater : GE가 후원하는 TV 및 라디오 시리즈)에 호스트를 맡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꽤 출연을 한다. GE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는지 명예홍보대사 같은 것을 맡게 되었고 레이건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연과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이들의 삶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정치에 투신하게 되는 그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해서 주로 기차로 다녔다고 하는데, 긴 시간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점점 생각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겨가게 된다.
1960년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케네디 대통령을 지지 하지 않고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존슨 대통령의 상대로 나왔었던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애리조나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지지 연설이 히트히트를 치게 되고 전국적인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지금도 많은 신인 정치인들이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면서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4년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하기 위해서 지지 연설을 하러 나왔던 버락 오바마를 들 수 있다. “진보적 미국이나 보수적 미국은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 존재합니다.”(there is not a liberal America and an conservative america. There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레이건 대통령도 당시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지지했는데, The Speech 혹은 ‘A Time For Choosing’(선택의 시간)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는 연설을 통해서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정부가 사람을 통제하지 않고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단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무력과 강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습니다.”
레이건은 1967년 1월 2일부터 1975년 1월 6일까지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맡게 된다. 그리고 대선에 두 번 정도 출사표를 낸 적이 있는데 조금 억울하게 공화당 경선에서 패한다. 그리고 1980년에 드디더 공화당 대선 후보 티켓을 획득하였고, 당시 지미 카터 민주당 대통령을 상대로 해서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다.
[레이건의 키워드 1]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레이건 대통령은 1979년 영국 총리로 올라선 마가릿 대처 총리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기수”라고 불린다. 이들의 경제정책, 즉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주의(Thatcherism)를 통해서 당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을 ‘레이건-대처 혁명’이라고 한다.
1930년대 대공황이 지나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각국 정부의 크기가 상당히 커지게 되었고, 재난 재해라든지 전쟁이라든지 국가적인 위기 사태를 통해서 정부는 권력을 많이 행사하면서 권한이 커지게 마련이다. 아울러 국민소득에서 정부의 지출이 커지고 세율을 높이고, 복지정책을 확장하고 정부가 시장에 많이 개임을 하는 Keynesian이라 얘기하는 그런 경제정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존 메이너스 케인스의 사상에 기초한 경제학(케인스 경제학)에서는 “단기적으로 시장경제가 불균형에 있을 수 있으며 이르 ㄹ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대화된 관료조직이 비효율, 재정 적자, 기업 활동 위축의 단점을 갖고 있었다.
어느 경제정책이든 한쪽으로(만) 가다 보면 결국에는 문제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관료조직이 비대해지면서 비효율적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게 되고, 재정적자라든지 또 높은 세율로 인해서 기업의 활동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여러 가지로 제동이 걸리게 된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부터 시작해서 시카고학파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밀턴 프리드먼 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레이건과 대처가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정책으로 구현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로는 규제를 철폐하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든지, 복지정책을 축소하고, 기업들이 활동을 더 많이 할 수있도록 법인세를 낮추어 주는 정책을 벌이는데, 이런 것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무론 이 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부의 불균형, 양극화가 더 심화되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에 ‘영국병’(British disease, 과도한 사회복지, 노조의 영향력 증대와 임금 상승, 생산성 저하로 인한 1970년대 영국의 경제침체를 비하하는 용어)이라는 것을 고쳤다고 해서 영국의 대처 수상이 상당히 존경을 받았고, 오일쇼크(1978~1981)를 지나면서 불안해진 경제, 그리고 강력한 통화정책(1981년 연방준비제도 기준금리 최고 21.5%)을 통해서 인플레이션까지 잡는 이른바 레이건의 경제정책이 그 당시엔 상당히 인기가 있다.
제2차 오일쇼크(1978~1981) : 세계 원유 공급의 15%를 담당하던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인한 원유 수출 중단에서 시작된 국제 유가 상승과 경제 혼란
레이거노믹스의 주요 정책 : 정부 지출 축소, 소득세 세율 인하, 정부 규제 축소, 화폐 공급량 조절
[레이건 키워드 2] 강경외교(Diplomacy)
레이건 대통령으로 인해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동구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된 것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에 해체가 됐으니까 레이건 대통령의 재임 시기(1981.1~1989.1)는 아니었다. 그런데 레이건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고 본다.
미국의 학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강력한 압박이 소련을 해체시킨 것이 맞다고 보면서 군비경쟁에서 소련이 재정적으로 힘들어질 수박에 없었고, 결국 해체의 길로 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러시아 쪽 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고르바초프라는 개혁 개방의 마인드를 가진 서기장이 등장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도 이야기한다.
레이건 대통령의 외교는 ‘힘을 통한 평화’였다. 전 세계에서 소련의 공산주의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세력을 심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등장한 시기가 1985년 3월인데 이 시기가 레이건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1981.1~1985.1)와 두 번째 임기(1985.1~1989.1)가 갈리는 시기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당시에 외교팀에는 네오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윌리엄 J. 케이시(CIA국장), 리처드 펄(국방 차관보), 진 커크패트릭(UN 대사) 등이 그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강경한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지칭하였고, ‘스타워즈’라고 지칭했던 SDI,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이 그 당시에 나왔다. 스타워즈라고 불렸던 전략방위구상은 핵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우주에서 요격을 해서 폭파시켜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임기에 들어서면서 레이건은 네오콘들과 약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의 의미있는 핵군축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중거리 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을 맺게 된다(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러시아의 조약 위반을 주장하며 폐기했다).
많은 미국인들의 머리 속에는 경제적인 부흥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세계 제일의 미국을 만든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의 롤모델이 레이건 아니었을까?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시 선거 구호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는데,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선거 구호는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흑역사]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적인 양극화와 지나친 민영화로 인한 폐해는 상식화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났는데, 적성국가인 이란에게 무기를 몰래 팔아서 그 자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의 반군이라 할 수 있는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을 해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통령 탄핵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실무진들이 책임을 지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일종의 꼬리자르기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민주당과 공화당, 인종문제에 대한 스탠스가 뒤바뀐 계기?]
노예해방을 가져온 링컨은 공화당 출신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화당은 점차 인종 문제에서 링컨과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1960년대에 흑인 민권운동이 일어났고, 1964년에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이 통과되면서 인종 종교 성별등에 따른 주요한 차별들이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1965년에 인종이나 피부색 등에 의해 선거 자격을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 도 통과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제36대 존슨 대통령 아래에서 통과되었다.
1964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당시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배리 골드워터 의원이었고 그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주 정부의 권한을 지나치게 억압해선 안된다’, ‘민권법은 연방정부가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의 권리를 인정해야 된다’라고 강력하게 이야기를 했던 인물이었다. 이때 흑인 유권자들의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낙점된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공식 유세의 첫 번째 일정으로 잡은 지역은 미시시피의 네쇼바 카운티(Neshoba County)였다. 1964년 6월, 흑인 유권자들의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는 freedom rides(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해 남부 지방으로 버스나 기차 여행을하던 시민운동) 운동을 하던 3명의 젊은이들이 남부를 여행하다가 행방불명된 사건이 있었고, FBI가 나서서 수사까지 하였고, 세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채 암매장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KKK단 그리고 지역의 보안관(Cecil Price) 경찰들까지 모두 연루가 되어 있었던 사실을 밝혀내었고, 이후 이 사건은 1988년에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의 모토가 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네쇼바 카운티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공식 일정의 첫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 이곳에서 했던 레이건의 연설은 ‘주 정부의 권리가 확장되어야 된다’는 내용이었고, 결정적으로 남부의 표심이 공화당으로 넘어가는 데 쐐기를 박았을 것으로 보인다.
[토론과 연설의 달인]
레이건은 토론과 연설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배우 출신이기 때문에 카메라에 대한 자연스러움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80년 대선 토론회에서 그는 “Are you better off then you were 4years ago?”(당신의 삶은 4년 전보다 나아지셨습니까?)라고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1984년 재선 때에 레이건은 73세라는 굉장한 고령이었는데 상대 후보는 56세의 젊은 월터 먼데일이었다. 나이로 인한 공세가 충분히 예상되는 선거였다. 그런데 레이건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가지고 이슈로 삼지 않겠습니다. 내 상대편 후보가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 경험이 없고 이런 점을 약점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할 말은 다 하고 상대방은 전혀 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에 월터 먼데일은 이 말을 들었을 때 딱 이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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