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30일 월요일

[조선18-1] 연산군 (1) 제왕? 폭군?

[조선18-1] 연산군 (1) 제왕? 폭군?

 

 

연산군은 19세에 왕에 오른다(재위 1494~1506). 1498년에 김종직의 조의제문때문에 무오사화(사림들이 해를 입는다)가 일어난다. 이때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종직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유배가서 죽는다. 50명 정도 죽는데, 이것 때문에 연산군을 폭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갑자사화(1504)가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은 나름 괜찮은 정치를 했다. 야인인 여진족을 몰아내고,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비용사라는 관청을 설치해서 우리나라 병사들의 철제갑옷을 제작하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였고, 흉년에 조세를 감면해주기도 했으며 환곡제도도 시행했다. 도적 홍길동(1443~?)을 잡아들이기도 했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몰래 비단기술을 빼오려고도 하였다.

 

갑자사화(1504)가 일어나면서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다. 연산군이 나이가 30정도 되면서 여색을 밝히기 시작했다. 장녹수라는 여인은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다(유부녀에 아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연산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장록수를 통해서 달랬을 것이다. 장녹수가 연산을 아이 다루듯 했다고 한다.

 


경기관찰사 홍귀달(1438~1504)의 손녀딸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다. 후궁으로 들이려고 했는데 홍귀달이 몸이 안좋아서 힘들다고 하였고 연산은 홍귀달을 귀양보내고 그 집안을 멸문지화(滅門之禍)시켜버렸다. 바로 이러한 때 간신 임사홍(1445~1506)이 연산군에게 접근을 한다. 그는 폐비 윤씨의 어머니(연산의 외할머니)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만나게 해 준다. 이때 폐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을 때 입있던 옷을 보여주고 연산군은 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산군은 성종 시절에 폐비 윤씨에 대해서 회의를 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한다. 이때 이미 죽어있던 정인지(1396~1478)나 한명회(1415~1487) 등은 부관참시 당하고 그들의 시신은 쇄골표풍(碎骨飄風)으로 뼈가 빻여져셔 바람에 날리게 된다. (영화 관상에서 관상쟁이가 한명회에게 언젠가는 목이 잘리는 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죄인들을 손을 뚫어 밧줄로 끌고오게 한다. 가슴을 쳐서 가슴뼈를 으깨서 죽이기도 한다. 불에 달군 쇠로 죽이기도 하고, 능지처참 등으로 잔혹하게 죽였다고 한다.

 

이후 왕에게 간언하던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날려버리고, 아버지 성종이 9천여번 했던 경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신하들이 왕에게 말할 때에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라고 하면서 신언패를 차고 궁궐에 출근하게 하였다. 신하들의 모자에는 을 써넣으라고 했다. 당시 조선의 왕들은 나름 유교적 틀 안에서 통치했는데, 연산군은 중국의 황제들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갑자사화 이후 사냥에 5만명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산군의 사냥터가 경기도였는데 사냥터에 백성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표를 설치하였다. 재정이 부족해서 공신전을 몰수해 버린다. 중국의 황제들 중의 폭군들과 비교해서 토목공사 등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것에는 싸이즈가 작았을 테지만 여색을 밝히는 데에는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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