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7강. 지중해 패권은 어디로 : 포에니 전쟁 2
칸나에 패전 후의 로마는 사방이 고립된다.
- 북쪽 : 갈리아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으면서 한니발과 친해짐)
- 서쪽 : 에스파니아 (한니발의 동생 하스르두발)
- 동쪽 :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5세와 동맹)
- 남쪽 : 시칠리아 (시라쿠사 쿠데타 사주)
한니발이 로마 포로 8,000명을 돌려줄테니 돈을 달라고 하였다. 이것에 동의하면 실질적 항복이라고 생각한 로마는 거절했고, 한니발은 8,000명을 그리스에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는 동쪽의 마케도니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리스의 반란을 사주하여 마케도니아의 발목을 잡는다. 서쪽의 하스르두발을 막기 위해서는 코넬리우스 형제(푸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스키피오, 그나이우스 코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보내서 8년 동안 막게 한다. 북쪽의 갈리아에게는 중립을 요구해서 일단 안정을 취한 로마는 남쪽의 시라쿠사를 쳐들어간다.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시라쿠사는 점령당하고 당시 75세였던 아르키메데스는 죽음을 당한다. (아르키메네스가 거리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공성장비를 발명하였다) 이때 로마는 아르테미스 축제일에 습격했다고 한다.
포에니 전쟁은 단결의 로마와 분열의 카르타고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한니발 형제들이 기껏 싸우면 카르타고는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들끼리 내분으로 한니발을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허를 찌른 스키피오의 활약
서쪽의 하스르두발을 막던 코넬리우스 형제들은 BC 211년에 스페인 전투에서 하스르두발에게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다. 이때 푸블리우스의 아들 스키피오가 26세의 나이로 집정관에 선출되고(원래 40세가 넘어야 집정관의 자격이 있었다), 스페인 전선에 투입된다. 원로원에서는 코넬리우스 형제들처럼 하스르두발을 막기만 하라고 했는데, 스키피오는 허를 찔러서 당시 패잔병을 이끌고 바이플라에서 하스르두발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은 하스르두발이 스페인을 떠나 로마로 향하는 길목을 열어준 계기가 되어서 주력부대가 남아있던 하스르두발은 8만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알프스를 건너 로마로 들어간다.
하스르두발을 막아낸 집정관 네로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한 하스르두발은 쉬면서 한니발에게 소식을 전하러 전령을 보냈지만 전령은 오히려 한니발을 막고 있던 집정관 네로에게 잡히게 된다. 네로는 하루 100km씩 행군으로 800km 북상하여 하스루두발을 기습하였다(메타우루스 전투). 여기에서 하스르두발의 부대는 대패하고 하스르두발이 전사한다. 네로는 하스르두발의 목을 한니발에게 선물로 보낸다. 하스르두발의 목을 받은 한니발은 이후 2년간 두문불출한다.
스키피오, 카르타고의 본진을 공격하다
한숨을 돌린 로마는 그 틈을 이용해서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로 쳐들어갈 것을 요구하였고,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공격할 때 카르타고는 항복한다. 항복의 조건이 한니발이 귀환이었는데,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돌아오자 카르타고는 마음이 바뀌어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서 역사적인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한니발의 카르타고가 자마에서 격돌한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대결 : 자마전투
자마전투는 누미디아 기병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공격할 때 누미디아 왕의 아들은 스페인에 있었다가 스키피오의 포로가 되었다. 누미디아 왕자를 환대한 스키피오는 이후 누미디아를 찾아가서 누미디아 왕과 담판을 하였고, 오히려 이후 로마의 기병에 누미디아 기병이 합류하게 된다.
한니발의 기병은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서 17년간 활동한 백전노장이었지만 나이가 많았고, 스키피오의 기병은 젊은 병사들이었다. 기병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를 전진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고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가 진격했지만 스키피오의 보병들이 긴 창으로 코끼리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코끼리들은 살기 위해서 뒤로 돌아 오히려 한니발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스키피오의 기병이 한니발의 기병을 뚫고 전세를 로마군으로 유리하게 전개시켰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죽음
스키피오
- 자마전투 승리 후, 로마 감찰관과 집정관 역임
- BC 184,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
- 52세 나이로 로마 저주하면서 사망
한니발
- 자마전투 이후, 전쟁영웅으로 카르타고 지도(43세)
- 카르타고 부패 일소 개혁으로 부흥 도모 - 로마이 소환 요구 - 소아시아 망명
- 비타이아 왕의 한니발 로마 송환 소식 듣고 자살
3차 포에니 전투 (BC 149~146)
2차 포에니전쟁 이후 50년간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를 공격하였다. 누미디아는 친로마 성향으로 카르타고와 영토 갈등을 겪고 있었다. BC 151년 누미디아 침공은 로마에게 전쟁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결국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공격해서 3년간 농성전 이후 카르타고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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