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6강. 지중해 패권은 어디로 : 포에니 전쟁 1
알렉산더 사후 제국의 분열
알렉산더는 정적들을 모두 숙청해 버렸고,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부하들끼리 권력 암투를 벌이며 후계자(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난다(BC 323~280). 당시 부하들은 안티고노스, 에우메네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아르사케스, 디오도투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등이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그의 후손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나온다.
1차 포에니전쟁 (BC 264~241)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와 시칠리아 섬을 놓고 카르타고가 처음 만나고 신경전을 벌인다. 메세나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으면서 양 진영은 대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육지전이 강했고, 시민군 중심으로 백병전이 강했으며, 카르타고는 해전이 강했고 대부분 용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주로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해전에서 불유리하다고 생각했던 로마가 승리를 거둔다. 로마의 배에는 코르부스(까마귀)가 있어서 배와 배가 마주했을 때 갈고리처럼 상대방 배를 붙잡게 되고, 백병전에 유리한 로마군이 상대방 배로 건너가서 싸울 수 있었다(해전의 육전화에 성공한다)
2차 포에니 전쟁 (BC 218~202)
1차 포에니 전쟁의 카르타고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는 전쟁 이후 스페인으로 이주하였고, BC 221년 하밀카르의 뒤를 이어 26세의 한니발이 카르타고의 사령관이 된다. 29세가 되는 BC 218년에 스페인의 동부 지역인 사군툼을 점령하였다. 이후 해안선을 따라 로마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는 마르실라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그 전에 한니발의 군대는 내륙쪽으로 들어가 사라지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였다. (알프스를 건널 때 한니발의 부대는 보병이 5만, 기병이 9천, 코끼리 37마리였는데 알프스를 건넌 이후 한니발의 부대는 보병 2만, 기병 6천, 코끼리 2마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에 로마에서 군인으로 무장이 가능한 인구가 75~100만이라고 본다면 한니발의 군대는 크게 감소한 것이다. 그런데 한니발은 이후 17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안을 휘젓고 다녔으며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
트라시메누스 전투
로마군이 호수를 오른쪽에 두고 행진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대열이 길어졌다. 이때 갈대숲에 숨어있던 한니발은 (로마군은 갈대숲 안개로 미처 눈치채지 못함)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쳐들어온 한니발이 로마의 지형지물에 익숙한 전술을 세운 것에 대해서 로마는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칸나에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은 자기편 보병이 밀리는 것을 허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군을 포위한 상황이 되었고, 이후 기병전에서 승리한 한니발의 기병이 로마군의 배후를 막아서면서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하루만에 5만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인 파리 솜강 전투(기관총이 사용됨) 이전의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칸나에 전투 이후에 한니발은 곧장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계속 이탈리아 반도를 돌아다닌다. 왕정이었으면 왕만 잡으면 끝이지만 공화정인 로마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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