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9일 목요일

[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5강. 헬레니즘의 시작 알렉산더 대왕

[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5. 헬레니즘의 시작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는 초원지대였다.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를 통일하고 그리스까지 공격해서 통일을 선포하는 상황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필리포스 2(BC 382~336, BC 359년 즉위)

  • 소년 시절 테베에서 3년 간 인질생활(BC 368~365)
  • 테베 에파미논다스 사선진 계승
  • 즉위 후 스파르타 제외한 전 그리스 굴복시킴(코린토스 동맹)
  • 필리포스의 암살 배후에는 페르시아, 알렉산더 등이 거론됨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델로스 동맹이 깨지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우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다(거의 30년 가까이 진행됨). 이때 소트라테스가 참전하여 활약하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민주정치인 아테네가 군인정치인 스파르타에게 패하는 것을 목격한다.

 

알렉산더의 등장


필리포스 2세의 주치의인 니코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더의 스승이 된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윤리학에 관한 책을 쓴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우스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평생 전쟁터에 학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후세에 남기려고 하였다.

 

이란 사람이 봤을 때 그리스 사람이 야만이었고, 그리스 사람이 봤을 때 서양 사람이 야만이었다. (알렉산더는 벽화에서 보면 금발이 아니고 흑발이다)

 

스파르타를 무찌른 테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이후 테베와 싸우게 된다. 육지에서 최강의 스파르타군은 의외로 테베에게 패하는데, 테베는 독특한 진영(사선진)을 개발하여 스파르타를 무너뜨렸다. 팔랑크스는 방패를 가진 사람이 기본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가 작동되어 자신에게 방패를 끌어당기려고 하고, 왼쪽 옆에 있는 병사는 본능적으로 방패를 의지하면서 오른쪽으로 붙게 된다. 그러면 점차 진영 자체가 오른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오른쪽은 공격을 잘하는 병사, 왼쪽은 방어를 잘하는 병사를 포진시키게 된다.

 

스파르타는 기본적으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민족이었는데, 예를 들어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서 연락을 담당한 병사는 죽지 않고 연락했다고 욕을 먹었다고 한다. (다음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어야 명예가 회복된다고 보았다) 이런 스파르타와 테베가 맞붙었을 때 누구도 스파르타의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다.

 

테베의 사선진은 오른쪽을 50열로 세우면서 스파르타의 강한 부분과 맞짱을 뜨는 진영이었다. 스파르타의 강한 부분을 집중 공략해서 무너뜨리는 전법을 사용한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보병과 기병


마케도니아는 초원지대라 기병이 활성화되었다. 스파르타의 보병을 격파하고 새롭게 강자가 된 테베의 보병을 마케도니아의 보병이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마케도니아는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창(테베의 창은 2.4m)이 아니라 적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창(4m짜리 창)을 사용하였다. 상대가 못들어오게 막는 역할을 하면서 시간을 버는 사이에 마케도니아의 기병이 돌아가서 공격하였다. [알렉산더 보병의 사리사]

 

한편 알렉산더의 기병대는 엘리트 기병대였다. 그들은 평생 말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등자와 안장이 없이 한 손으로는 말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창을 들고 전투에 임했다. (그들은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상식적으로 보병과 기병이 싸우게 됐을 때 싸움을 결정하는 것은 기병이었다. (기병이 원할 때만 싸움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로 쳐들어간 알렉산더


필리포스 2세가 죽자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고, 젊은 알렉산더가 테베를 진압하면서 그리스를 통일하였고,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그리스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페르시아를 쳐들어갔다. 그런데 실지로는 페르시아 전쟁 때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편을 들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이수스 전투(BC 333)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쳐부수고 이집트 원정을 거쳐서 가오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군대를 대파한다. (가오가멜라 전투에서는 페르시아의 전 부대가 다 모였다) 이후 알렉산더는 인도까지 원정을 갔다가 기나긴 원정에 지친 부하들의 불만으로 되돌아 오다가 병으로 죽게 된다.

 

전쟁은 쪽수로 한다!


중국의 인구는 진시황 때 4~5천만이었는데 삼국시대에는 천만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다. 중국의 삼국지를 보면 당시 중국은 13개 주가 있었고, 위나라가 8개주, 오나라가 4개주, 촉나라가 1개주(2개였다가 형주를 빼앗김)였다. 그런데 당시에 전쟁으로 황폐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구는 위나라가 500, 오나라가 300, 촉나라가 200만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위나라 지역에서 전쟁이 많이 일어났었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던지고 위나라를 공격한 것은 그때가 아니면 위나라를 정벌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사마의는 방어만 했다. 왜냐하면 시간은 위나라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지나면 위나라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국력은 쪽수에 비례했다.

 

가우가멜라 전투


페르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시작과 함께 페르시아의 전차부대가 마케도니아를 향해 돌진했지만, 전진만 가능했던 전차부대는 궤멸당한다. 이후 페르시아의 양쪽 기병이 돌진하였고, 마케도니아 기병은 버티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의 남은 기병은 마케도니아의 오른쪽 진영이 밀리니까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페르시아의 비어있는 틈을 발견하고 알렉산더가 그곳으로 돌진하여 다리우스가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다리우스는 도망쳤고 페르시아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이때 마케도니아 진영의 왼쪽을 지키던 파르메니온의 아들이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해달라고 요청해서 알렉산더는 그를 구하러 가서 그쪽을 공격하던 페르시아군을 궤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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