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9일 목요일

[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4강.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사 4

[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4.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사 4

 

3차 페르시아 전쟁 : BC 480

 

페르시아는 1차와 2차 전쟁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력이 커진다.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페르시아는 다시금 대부대를 보내서 그리스를 혼내주려고 하였고, 이번에는 육군과 수군을 동시에 보내게 된다.

 

페르시아의 육군은 소아시아에서 트라키아를 건너 발칸반도의 북부에서 남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트라키아로 건너갈 때 부교를 건설하여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그리스 전역이 공포에 휩싸인다. 페르시아의 해군은 1,200척이 동원되었다. 한 배 당 200명이 탔다고 가정하면 거의 20만에 육박하는 병력이었다.

 

이때 그리스는 페르시아를 막기 위해서 델로스 동맹을 체결하는데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막아내기로 한다.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 왕은 페르시아를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막으려고 했고, 이 당시 육군의 7천명 중에 최정예 군대가 스파르타의 30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상속자가 있는 사람들로 선발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파견된 신립은 협곡인 탄현에서 왜군을 막지 않고 탄금대(백사장)에서 싸웠다. 그런데 당시에 신립의 부대는 기병이었기 때문에 협곡에서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왜군은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기병이 사라졌다(오다 노부나가의 조총 부대 활약). 기병은 말 위에서 전쟁을 하기 때문에 훈련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기병은 직업군인일 수밖에 없었다. 신립은 왜군이 보병 중심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기병을 데리고 갔는데, 조총부대를 간과했던 것이다.

 

협곡을 방어하는 데에는 보병(팔랑크스)이 강했다. 심지어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의 보병이었다. 페르시아의 궁병이 화살을 쏘아서 태양이 가려졌을 때, ‘그늘에서 전쟁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기계가 되어 있었던 스파르타군이었다. 협곡은 페르시아의 부대가 쉽게 뚫지 못했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대다수의 페르시아 부대는 돌아서 아테네로 진격하였다. 어차피 레오디나스 왕의 스파르타 300명은 적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놓으려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적의 우두머리를 예우하지 않고 목과 시신을 창에 꿰어 전시하였다. (그 정도로 열받았다는 이야기)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테네는 농성전이냐 후퇴냐를 놓고 고민하다고 결국 살라미스로 도망간다. 이때 또 페르시아의 1,200대 함선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 이후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에 의해서 해군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당시에 육군을 강화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스파르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함대는 300척으로 페르시아의 1,200척에 비해서는 적은 숫자였다.

 

이때 또 다시 코린트로 도망갈 것인가 살라미스에서 싸울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도망가자는 여론이 우세한 가운데 크세르크세스에게 정보를 흘렸고, 페르시아 군대가 코린트로 도망가는 길을 막아버린다.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살라미스 해전

 

페르시아 배는 그리스 배보다 규모가 컸다. 그런데 반면 풍랑이 센 곳에서는 큰 배가 더 많이 흔들리기 때문에 운용이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함대를 살라미스 협곡으로 유인하였다. 물살이 센 협곡에 들어선 페르시아의 함대의 옆을 작은 그리스 배가 지나가면서 노를 박살내 버렸다. 노가 없이 물살에 휘말리는 페르시아 함대는 결국 자중지란에 빠져버린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의 366(6천명)이 페르시아의 1207(18만명)을 격파하였고, 그리스는 40척만 파손된 반면 페르시아는 200척이 파손되면서 패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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