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3강.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사 3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이다. 1982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 마라톤이라는 종목이 없었다. 자기들의 조상이 패배한 것을 기념하는 경기를 이란이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란이 세계를 재패하면 마라톤이라는 종목은 없어질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를 변방 중의 변방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듣보잡이었던 것이다. 페르시아가 제국을 확대하면서 지중해 해상 무역권을 얻으려고 하면서 그리스를 쳐들어간 것이다.
1차 페르시아 전쟁 : BC 492년
소아시아의 이오니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오니아의 동맹이 아테네였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배가 밤에 다니지 못하고 낮에만 다닐 수 있었고, 소아시아에서 곧바로 아테네로 건너가지 못하고 해안가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당시 항해술로는 육지를 기준점으로 삼아서 자신들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파악했어야 했다). 다리우스 1세가 600척의 대함대로 아테네를 향해 공격을 했는데, 아토즈 곶에서 풍랑으로 2만명이 수몰되면서 끝나버렸다.
2차 페르시아 전쟁 : BC 490년
페르시아는 1차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아테네와 이오니아 사이의 섬들을 거슬러 건너가기로 하고 2만 5천의 병력을 보낸다.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해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모여서 단결하기로 하고 중무장 보병들을 모아서 페르시아가 상륙할 마라톤 평원으로 집결한다. 이때 페르시아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만 명은 아테네로 향하고, 1만 5천명이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였다. 그리스 입장에서는 마라톤 평원의 1만 5천명을 빨리 격파하고, 아테네로 향하는 1만명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그리스의 지휘관은 밀티아데스였다. 마라톤 평원의 전투를 앞두고 기병과 궁병이 없었던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측면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예상하고 평소 8열이었던 팔랑크스를 4열로 줄여서 길이를 늘였고, 양쪽을 조금 두텁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방이 강한 팔랑크스가 빨리 페르시아의 중앙의 보병을 격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결국 이 전투에서 그리스의 전사자는 192명인 반면, 페르시아는 6,400명이 전사하게 되었다. 그리스는 전투가 끝난 후 한 명을 선발하여 아테네로 보내서 승전의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마라톤의 기원)
아테네로 향하던 페르시아의 1만 군대는 마라톤 평원에서 승리하고 서둘러 아테네로 합류한 그리스의 군대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퇴각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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