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역사를 바꾼 전쟁사 1] 2강.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사 2
그리스의 전법은 한마디로 팔랑크스[phalanx]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부대에는 기병과 궁병이 없었다. 그리스에 기병이 본격화되려면 북쪽의 마케도니아(알렉산더)가 등장해야 한다. 기병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보병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궁병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보병 중심의 밀집대형으로 창과 방패를 갖고 있었다.
[부대의 먹이사슬]
- 보병을 잡는 기병, 기병을 잡는 궁병, 궁병을 잡는 보병
- 기본적으로 갑옷을 입는 것은 화살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 이러한 갑옷을 뚫는 것은 창이다.
- 따라서 그리스의 보병들은 창과 방패를 가진 부대였다.
- 이러한 그리스의 부대는 (기병과 궁병을 소유한) 페르시아가 보기에는 단순 무식한 군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의 전쟁은 보병끼리만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창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방패, 한손에는 창을 들고 전투에 임했다.
오른손으로 창을 들었을 때 창을 든 쪽(약점)을 막아주기 위해서는 오른쪽 병사의 왼쪽 방패가 필요했다. 그리고 대장은 병사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나름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팔랑크스는 단결력과 신뢰가 가장 중요했다. 나의 방패는 옆사람의 약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전투에 참가했을 때, 목에 총알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던 적이 있다. 처음에 총알이 목을 관통했을 때 드는 생각은 ‘내가 어디 종 맞았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름 의학 상식을 알고 있어서 ‘목에 총알이 관통되었다’는 말을 들은 뒤에 ‘2분 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체력전이었다. 갑옷의 무게가 갑옷 30kg, 그리고 든 무기가 20kg였다고 한다. 창과 방패로 상대방의 창과 방패를 향해 전진해서 공격(창)과 방어(방패)를 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순간 도미노처럼 붕괴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정 시점까지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다고 일정시점에 사상자가 발생한 순간에 전멸되기도 한다.
[팔랑크스 약점]
1. 공성전을 못한다. 그래서 포위해서 적이 굶주림에 지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전법을 사용한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싸울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동맹(델로스)을 맺고 페르시아와 싸웠다. 스파르타의 주력부대가 손상을 입었고, 아테네의 해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했을 때 아테네의 힘이 강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아테네가 성을 쌓을 때에는 스파르타에 대비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을 때 아테네는 성을 쌓지 않기로 약속을 했는데, 후에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에 아테네가 성을 쌓아서 스파르타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가 쳐들어와서 포위해도 풍부한 물자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스파르타와 아테네와의 싸움은 의외로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의 성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면서 전염병(흑사병)이 창궐했고 아테네가 궤멸되고 항복하면서 스파르타가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2. 팔랑크스는 전진공격만 가능하다. 측면과 후방은 치명적이다.
3. 팔랑크스는 평야에서만 싸울 수 있다. 산악지형에서는 밀집대형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후에 로마와의 싸움에서 박살나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이 소아시아, 이집트 등을 장악하고 제국을 형성한 후에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당시 야반으로 보이던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해서 그리스는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에 대항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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