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세계를 바꾼 혁명사 1] 6강. 프랑스 혁명(3) - 혼군은 어떻게 죽음을 자초하는가?
루이 16세는 사치로 죽음을 자초하였을까?
원래 사치의 대명사인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가 만들었다. 오히려 루이 16세의 이전 왕들이 사치를 즐겼다.
[목걸이 사건]
- 1772년 루이 15세는 당시에 푹빠져있던 뒤바리 백작 부인에게 200만 리브르짜리 선물로 목걸이를 주려고 한다. 주문을 받고 만들고 있는 사이에 루이 15세가 죽어버렸다. 만들던 사람은 맛이 갔다... 왕비에게 팔려고 하는데 비싸고 바리 백작에 대한 감정이 나빠서 사지 않았다.
- 이때 사기녀가 등장했다. 잔느 드 발루아라는 여성인데 라모트(군인) 백작의 부인이었다. 당시에 그는 왕비와 사이가 나쁘지만 재상이 되고 싶어했던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했다. 잔드 드 발루아는 추기경에게 왕비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고, 왕비와 닮은 창녀를 고용해서 만나게 했다. 그 창녀는 추기경에게 목걸이 사는 거 중재해 달라고 하면서 어음을 주겠다고 한다. 추기경은 세공사를 찾아가서 왕비가 목걸이를 사겠다고 했다며 어음과 함께 자신의 돈을 줬다. 잔느 드 발루아는 추기경에게 목걸이를 왕비에게 드릴테니 일단 목걸이를 달라고 하였다.
- 이 사기 사건으로 마리 앙투와네트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적대 세력은 마리가 로앙 대주교를 애인으로 삼고 그와 정사를 나눴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마리 앙투와네트(1755~1793)
- 오스트리아 예카트리나 대제의 막내 딸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14세 때 루이 16세와 정략결혼
-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적자 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됨
- 결혼 후 7년 간 왕위계승자를 낳지못해 프랑스 국민에게 미움을 사게 됨
- 왕실 예산 - 당시 프랑스 전체 예산의 3%였으며 왕비는 그 중 10%도 못썼다. 이것은 전체 예산의 0.3%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혼군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 : 무능
- 루이 16세의 취미는 자물쇠와 열쇠 만들기였다. 그는 궁전에 자물쇠공을 불러서 하루종일 소년들과 자물괴 열쇠 만들기에 열중하였다.
- 삼부회를 궁전 부근에 소집하였는데, 사냥에 열중한 왕이 베르샤유 궁전을 떠나기 싫어서 근처로 잡았다고 한다. 만약 궁전에서 먼 곳이었다면 혁명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혼군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 : 불통
- 삼부회 소집시 백성들의 반응
“국왕은 우리에게 불만을 호소할 자유를 주셨다. 얼마나 귀중한 은덕인가? 인자하신 관심을 보이며 국민에게 하문하려는 국왕 폐하에게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 삼부회 소집하며 루이 16세의 말
“일반적인 불안과 개혁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사람들을 뒤흔드는 지금, 현명하고 온건한 의견을 종합해 조속히 적당한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세론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혼군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 : 거짓
- 혁명직후(1790) : “나는 속았다. 짐은 아직도 프랑스인의 국왕이다.”
- 오스트리아 명명시도 직후 : “나는 납치당했다.”
- 사형대에서 : “국민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
혁명의 종언 : 테르미도르 반동
- 로베스 피에르 : 온건파 당통과 급진파 에베르를 처형함
- 테르미도르 반동 : 1794년 7월 27일(열의 달)
- 다음날 로베스 피에르 처형
- 온건공화파 집권 : 혁명 과업 전부 부정
- 자유시장도입 - 물가상승 - 최고가격제 폐지 - 민중생활고
- 1795년 국민공회 - 새 헌법으로 위기 타개 시도 - 총재정부 수립(또 무능)
다시 왕정 복고 : 나폴레옹(1769~1921) 등장
- 1793년 영국과 에스파냐가 봉쇄한 툴롱 항구 탈환
- 20대 여단장 승진 - 오스트리아에 연전연승
- 영국 무역로 차단 - 이집트 원정
- 홀홀단신 귀국 :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총재 정부 타도하려는 세력이 모은 군대를 지휘함
- 1799년 11월 9일 통령정부 수립(안개의 달 브뤼메르)
- 1804년 황제 취임
혁명은 무엇으로 붕괴되는가? 분열
-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 자는 같은 실패를 되풀이한다.
- 전사의 심장으로 꽃을 던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