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세계를 바꾼 혁명사 1] 4강. 프랑스 혁명(1) - 혁명의 배경
혁명의 토양 : 1) 불평등, 2) 착취구조, 3) 이데올로기(신사상), 4) 경제적 위기
혁명의 토양 : 불평등
혁명 이전의 프랑스에는 제1계급인 성직자, 제2계급인 영주, 그리고 제3계급(브루주아, 노동자, 농민)이 있었다.
제1계급인 성직자는 2,700만 중에 10만 정도였는데, 전 국토의 1/10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지대, 성직자로서 십일조를 받고 있으며 면세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제2계급인 귀족은 40명 정도였는데, 전 국토의 1/5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지대를 받으며 교회, 군대, 행정의 고위직을 차지하며 연금혜택을 받고 있었다. 반면 제3신분은 동유럽의 농노, 영국의 농업노동자는 아니었으며 자영과 소작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인두세, 소득세, 십일조, 토지세, 소작료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혁명의 토양 : 착취
샤를 7세(1403~1461)년에 120만 리브르였던 토지세는 루이 16세(1754~1793) 때 8,000만 리브르가 되었다. 그리고 7세 이상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강제로 사야 했고, 정부에서 파는 소금은 실제 시세의 10배에 달했다. 이러한 염세 때문에 매년 30,000명 이상이 투옥되었고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염세를 정부 관리자가 징수하지 않고 정부가 청부업자에게 청탁하는 구조였다.
혁명의 토양 : 신사상
신사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보수반동의 시대에서, 변두리에서, 신계급에 의해 나타난다.
[보수 반동] 당시 프랑스는 보수반동의 시대였다. 앙리 4세가 1587년에 낭트칙령으로 위그노파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했지만, 루이 14세는 다시금 가톨릭을 국교화하면서 상공업을 장악한 위그노를 박해하였다. 중상주의(보호무역)을 하였으며 72년간 재위하면서 아들과 손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변두리] 그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1류 국가였던 프랑스가 2류 국가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으로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으며 유럽의 중심이었던 프랑스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인도-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에게 모두 패하고 밀려났다. 영국은 1760년에 산업혁명을 일으키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신계급] 상 퀼로트. 과격 공화파의 별명이었다. 이들은 퀼로트(귀족바지, 반바지)를 입지 않는, 아주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자코뱅의 이념을 따르는 파리싀 소시민이었다. 이들은 프로이센의 파리침략이 가까워졌다는 소리가 들리자, 감옥으로 쳐들어가 죄수자들을 공격하였고, 성직자와 귀족들(反혁명세력)을 직결재판하였다.
이 당시 계몽주의의 3총자는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였는데 이들에 의해서 이런 질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 귀족은 왜 특권을 가졌는가?
- 세상은 왜 그렇게 주어진 것인가?
-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순 없는가?
- 진보란 불가능한 것인가?
- 권위는 절대적인 것인가?
- 스스로 생각하고 직접 시험하라.
볼테르, 『캉디드』 - 종교권위로부터의 자유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 3권 분립
루소, 『사회계약론』 - 계약을 통한 주권의 형성
신계급의 정체는? Not Bourgeoisie But Intelligentsia
디드로 달랑베르 - 백과전서
1751~1772년 총 33권 160명 집필진
인쇄술의 발달 : T. 페인의 『코먼센스』는 수십만 부 1776년 펜실베니아
G.G.B. 바이런의 『해적』은 발매 당일 1만 부 1814년에 발행
신사상? 포르노 그라피?
로버트 단턴 - 『책과 혁명』
- 당시 금서 목록은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이 아니라 추문, 비방문, 포르노그피였다.
-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사상은 상층에서 시작하여 하층까지 침투한 계몽사상의 정치적 담론이 아니라 <방황하는 창녀>, <루이 15세의 사생활>과 같은 포르노그래피와 중상 비방문이었다. “앙시앵 레짐의 정통성의 기초를 갉았다.”
- 오늘날에서 진보적 사상가의 저작보다 민중을 움직이는 것은 자극적인 찌라시다.
혁명의 토양 : 경제위기
- 이전 2세기에 비해 인구 100만이 증가하였고, 18세기에 전염병이 소멸되면서 2천만에서 2천 600만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 가난한 인구의 증가로 사회적 긴장감과 불안이 팽배해졌다.
- 1788년 대흉작, 90년만의 한파로 곡물가 규제완화로 곡물가격이 상승하였다.
- 파리 노동자 생활비의 88%가 빵 값이었다.
이때 영국에서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등장하였는데,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결혼하지마’, ‘낙태해’, ‘영아살해 해’, ‘굶겨죽여’, ‘전쟁해서 죽여’, ‘전염병으로 죽여’ 등이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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