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 - 세계를 바꾼 혁명사 1] 2강. 청교도 혁명(2) - 혁명의 전개
제임스 1세(1566~1625, 재위 1603~1625)는 외가쪽이 튜더왕조의 헨리 7세와 연결되어 있어서 잉글랜드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절대왕권을 누리고자 사치에 열중한 ‘사익을 추구한 왕’(사익왕)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 왕실 경비의 7배를 사용하였다. 자신의 사위를 돕기 위해 의회에 재정 확보를 요청하였고 의회의 질책이 있자 7명의 의원을 구속하기도 했다. 귀족에게 증건을 팔아 돈을 받고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왕실 소유의 나무들을 베어 파는 등 재정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그는 편향된 종교관을 갖고 있었는데,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며 영국 국교회를 강화하였고 가톨릭 및 청교도를 박해하였다. 이때 박해를 피해서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1620년 영국 최초의 이민 청교도(필그림 파더스)가 북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된다.
청교도 혁명의 전개 : 찰스 1세(1625~1649)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1600~1649, 재위 1625~1649) 역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으며 국교회를 지지하는 등 아버지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찰스 1세 시기에 버킴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실정이 있었고, 해외 원정을 줄줄이 실패하였다. 프랑스 라 로셸 지역의 종교 분쟁에 개입하였다가 패배하면서 재정이 악화되어 재정 지원 문제로 의회를 소집하였고 권리청원을 수용하였다(1628).
1215년에 채택된 마그나카르타는 왕이 세금을 귀족의 동의없이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권리청원은 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마음대로 징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왕은 이것을 수용하였고 이후 의회를 해산한 후에 11년 동안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주교전쟁(1639년)
1639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통일된 제도를 강요하였다. 찰스 1세는 국교회 제도를 강요했는데 스코틀랜드는 주교가 없는 장로교 제도를 원했다.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에서는 국민의 불만을 먼저 처리하자고 주장했는데,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뤘다가 패하고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부담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시 의회가 소집되었고 국왕 편 귀족들은 처형되었고 정기적으로 의회를 개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의원 동의 없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는 법안에 국왕이 동의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반란(1641년)
1641년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에서 가톨릭 세력이 신교도 3,000명을 살해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의회가 열렸는데 진압군의 지휘를 누가 할 것인가를 놓고 국왕파와 의회파가 싸우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하였지만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등장으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크롬웰은 “소수의 정직한 대원들이 다수보다 낫다”고 주장하며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직업군대(용병은 아님)를 조직하여 1644년 마스틴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고,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크롬웰의 철기군에 청교도인들이 많이 합류해 있었다. 이후 의회파는 찰스 1세가 입헌군주제를 수용하길 기대했으나 찰스 1세는 아일랜드에 있는 가톨릭교도들과 내통하여 제2차 잉글랜드 내전(1648~1649년)을 일으켰다. 결국 재판에서 찰스 1세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다.
올리버 크롬웰은 성공한 혁명가인가? 실패한 독재자인가?
올리버 크롬웰은 운동경기, 춤, 음주, 도박을 금지시켰다. 의회를 해산하였고 호국경(오늘날의 계엄사령관)이 되어 절대권을 누렸으며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20~30만을 학살하였는데 당시 인구의 1/4에 해당하였다. 크롬웰에 의해서 대륙과는 반대로 개신교가 가톨릭을 탄압하는 상황이 되었다.
청교도 혁명?
청교도를 몰아낸 청교도 혁명이었다. 장로파 중심 의회의 反크롬웰 세력이 망명중이던 찰스 2세를 불러들여 다시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당시 종교는 이미 뒷전이었다.
당시 국외로 나간 청교도들은 영국 상업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커피 하우스’는 정치적 대화의 장소로 발전하였고, (홉스, 로크 등의) 경험론 철학자들의 활동이 있었다. 이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정신도 싹이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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