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4일 금요일

[김지윤의 지식play] 양키? 삭스? 야구 구단 이름은 어떻게 짓는걸까? 메이저리그의 역사! | MLB, 프로 야구, 미국사

[김지윤의 지식play] 양키? 삭스? 야구 구단 이름은 어떻게 짓는걸까? 메이저리그의 역사! | MLB, 프로 야구, 미국사

 

현재 미국의 메이저리그에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양대 리그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에 내셔널리그가 먼저 생겼다. 187622일 내셔널리그가 창설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야구 협회는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야구 선수 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Baseball Players), 미국 프로 야구 선수 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Professional Baseball Players) 등의 연합기구들이 있었다.

 

메이저리그의 출발


당시에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를 소유하고 있었고, 시카고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던 윌리암 암브로스 헐버트(William A. Hulbert)라는 인물이 구단 경영뿐만 아니라 이 구단들간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야구 리그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사업하는 사람들이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셔널리그(National League, 1876)였다. 헐버트가 만든 규칙 중에는 1) 일요일에는 경기를 하지 않는다. 2) 구장 내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3) 입장권 가격을 50센트로 올린다는 것이었다. 당시 50센트는 꽤 부담이 가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류층 스포츠인 폴로같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헐버트는 야구를 좀더 고급스럽고 품위있는 경기로 자리매김을 하려고 했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오늘날 메이저리그에서는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예를 들면 타격 후 배트를 던지는 한국의 야구 문화 빠던은 비매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룰들에 대한 반발과 피해도 존재했다. 가장 큰 반발과 피해를본 구단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Cincinnati Red Stockings)였다. 신시내티가 당시 독일 이민자들이 많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야구 보는 데 맥주를 못마시게 하니까 화가 나고, 일요일에 야구 경기를 안하니까 노동자 계급이 야구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일요일에 몰래 경기를 하고 술도 팔다가 적발이 된다. 그래서 내셔널리그 규칙 위반으로 1880년에 퇴출된다.

 

아메리칸리그의 출발


내셔널리그 규칙에 반대하는 팀이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사업가들이 구단을 만들어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 통칭 AA)1882년에 창설하게 된다. 이들은 일요일에 경기도 하고, 술도 팔고, 입장권도 25센트로 낮췄다. 당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구단주들 중에는 양조업자가 많았다고 한다. “The Beer & Whiskey League”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소속된 팀들의 실력이 떨어졌다. 재정적으로 힘들어져서 결국 AA리그는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내셔널리그의 독주체제가 생기게 되고 12개 팀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12개 팀들이 실력차가 너무 많이 나게 된 것이다.

 

1990년 내셔널리그에서 12개 팀에서 4개 팀을 내보내고 8팀만 관리를 하게 된다. 당시 마이너리그였던 웨스턴리그를 운영하고 있었던 밴크로프트 존슨(Bancroft “Ban” Johnson)이라는 사람이 내셔널리그에서 쫓겨난 팀들하고 이미 내셔널리그 팀이 있는 도시들에 새로운 팀을 육성해서 8개 팀으로 구성된 아메리칸 리그를 1901년에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내셔널리그가 화를 냈는데, 아메리칸리그가 생각보다 인기를 많이 얻게 되니까 이것을 울며겨자먹기로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1903년에 첫 월드시리즈가 열리게 된다(아메리칸리그의 보스턴 vs 내셔널리그의 피츠버그).

 

메이저리그의 서부개척시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게 된다. 메이저리그 야구팀들은 거의 동부 아니면 약간 중부에 집중되어 있었다(원정경기를 가려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런데 1950년대가 되면서 항공산업이 발전하면서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야구 팀들이 서부로 확장하게 된 것이다. 부르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가 대표적인 예이다. 1958년부터 부르클린 다저스는 LA로 옮겨가서 LA 다저스로 시즌을 시작하였고, 뉴욕 자이언츠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거 샌프란시시코 자이언츠로 시즌을 시작하였다. 마치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서부 개척 역사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한다.

 

메이저리그 구단 이름에 대하여


최근에는 신생팀이 생기면 공모전 같은 것을 해서 이름을 정하기도 한다(탬파베이 레이스, 토론투 블루제이스). 사실 예전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지역이름과 리그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름이 너무 길어서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이것을 줄이려고 별명 같은 것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주로 양말 색깔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 스타킹스 등이 있다. 예전에는 멀리서 보고 기사를 써야 하는데 눈에 띄는 게 스타킹이었던 것이다.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와 보스턴 비스]


미국의 최초 프로페셔널 야구팀은 1866년 창단된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Cincinati Red Stockings)이다. 나중에 여기 있는 선수들이 보스턴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1871년에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를 창단한다. 1883년에는 Boston Beaneaters라고 이름을 바꾼다(1906년까지). ‘콩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사실 보스턴의 별명이 빈 타운’(Bean Town)이다. 그러다가 보스턴 도브스(Boston Doves)로 이름을 바꾼다(1907~1910). 이후 보스턴 러슬러스(Boston Rustlers)로 다시 바꾼다(1911). 러슬러스는 도둑이라는 뜻이다. 1912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Boston Braves)로 이름을 바꾼다(1912~1935). 이 보스턴 브레이브스가 1914년에 대단한 시즌을 갖는다. 전반기에 2640(승률 0.394)에서 후반기 6819(승률 0.782)를 기록하며 꼴찌로 출발했다가 결국 월드시리즈에 우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자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니까 이름이라도 좀 바꿔보자는 생각을 해서 바꾼 것이 보스턴 비스(Boston Bees, 꿀벌, 1936~1940)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보스턴 브레이브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는 원래 이름이 보스턴 아메리칸스’(Boston Americans, 1901~1907)였다. 나중에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로 이름을 바꿨다. 처음에는 빨간 양말이 아니라 파란 양말을 신고 경기에 임했었다. 어쨌든 보스턴 레드삭스가 보스턴에서 점점 인기를 얻게 되니까 보스턴 브레이브스가 연고지를 밀워키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아틀랜타로 옮기면서 현재의 애틀랜다 브레이브스(Atlanta Braves, 1966~)가 된 것이다.

 

[신시내티 레즈]


정치적인 이유로 이름을 바꾼 경우도 있다.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는 원래 이름이 중간에 한번 바뀐 적이 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 있었다. 1950년대 미국의 상원이었던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색출에 열을 올렸었다. 당시 적색공포(Red Scare)라고 해서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에 굉장히 두려움을 느꼈던 시기였다. 야구단 이름이 신시내티 레즈였기에 이름을 신시내티 레드레그스(Cincinnati Redlegs, 1954~1959)로 바꾸었다.

 

[뉴욕 양키스]


뉴욕이 원래는 뉴욕 하이랜더스(New York Highlanders, 1903~1912)였다. 구단이 맨해튼 고지대에 위치해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문기자들이 뉴욕 하이랜더스 윈(win)이라고 쓰려니까 너무 글자가 많아서 줄이려다가 뉴욕 양기스’(Yankees) 혹은 뉴욕 양크스’(Yanks)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1913). 당시 뉴욕 양키스 구단주 이름이 조셉 고든(Joseph Gordon)이었다. 그래서 종종 고든의 하이랜더스(Gordon's Highlanders)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의 굉장히 유명한 보병연대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고든 하이랜더스(The Gordon Highlanders)였다. 그래서 당시 뉴욕 하이랜더스 팬덤은 이민을 온 아일랜드계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피츠버그 버거스,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


대책없는 이름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피츠버그 버거스(Pittsburgh Burghers, 1890)에서 버거스는 햄버거가 아니라 burgh(도시) 주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부르클린 다저스의 이름이 예전에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bridegrooms, 새신랑들)였던 적이 있었다. 1888년부터 1898년 당시에 팀원 여섯 명이 이 시기에 결혼을 해서 새신랑이었다고 한다


[탬파베이 레이스]


탬파베이 레이스는 1998년에 창단된 신생팀이다. 처음에는 스팅레이스(Stingrays, 매가오리아목의 가오리)라고 짓고 싶어했다고 한다. 플로리다 쪽에 연고를 두고 있으니 가오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문제는 하와이 윈터리그에 마우이 스팅레이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데빌 레이스(Devil Rays)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이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계속 항의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2007년까지만 데빌 레이스를 쓰고(1998~2007) 2008년부터는 데빌을 빼고 레이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해 탬파베이 레이스가 2008년 시즌 9765패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를 차지하였고, 월드시리즈까지 진출을 하였다.)

 

[텍사스 레인저스, 워싱턴 새너터스]


추신수 선수가 뛰었던 텍사스 레인저스 같은 경우에는 워싱턴에 있었던 팀이 텍사스로 옮겨와서 이름을 바꾸고 만들어진 것이다. 워싱턴 당시의 팀 이름은 워싱턴 새너터스’(Washington Senators, 1961~1971)이었다. 워싱턴 상원의원들이라는 뜻이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김하성 선수가 뛰고 있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파드레스는 스페인어로 아버지, 성직자라는 뜻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들이 캐리포니아에 와서 샌디에이고에 첫 선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1769년 최초의 가톨릭 수도원 건립).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경기장에 가면 탁발승의 가면을 쓴 마스코트들이 응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1탄] 아프가니스탄이 시끄러운 본질적인 이유 (22분 순삭 Ver.) #167

[아프가니스탄 1] 아프가니스탄이 시끄러운 본질적인 이유 (22분 순삭 Ver.) #167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려면 국제적으로 여러 나라들이 엮여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효기심 : 아프가니스탄 1편]

 


아프가니스탄은 고대 중세까지만해도 민족국가가 없었다. 수많은 역사와 사건 사고를 거치면서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아프가니스탄은 1700년대까지도 민족이 통합되지 않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지역은 수많은 이민족이나 강대국들이 쳐들어오기 딱 좋은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때문에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에는 굉장히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문제는 이 민족들이 오늘날까지도 별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 아프간족(파슈툰족) : 42%
  • 타지크족 : 27%
  • 하자라족 : 9%
  • 우즈벡족 : 9%
  • 그 외 : 13%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여러 나라들이 존재하는데 거의 대부분 스탄이라는 글자가 뒤에 붙어 있다. 여기에서 스탄이라는 글자는 페프시아어로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아르메니아(하얀스탄)

 

파슈툰족이 페르시아어로 아프간이라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파슈툰족의 땅, 아프간족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아프가니스탄이 된 것이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헌법에는 민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민족을 아프간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프간 민족국가의 등장


1747년 두라니 제국이라는 아프간족(파슈툰족) 민족국가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에 아프간에는 외세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존재하고 있다. 해외 봉사 단체가 아프간에 봉사를 하러 가도 호의적이지 않은 실정이다. 외세에 대한 반감에다가 내부적으로 민족들끼리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9%를 차지하는 하자라인은 아프가니스탄 안에서 심판 핍박을 받고 있던 민족이었다.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반감 중에서 특히나 몽골에 대한 반감이 심한데, 몽골계와 외모가 비슷한 하자라족들이 핍박을 받아온 것이다. 게다가 하자라족은 아프간의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 이슬람 수니파가 아니라 이란이 많이 믿는 시아파를 믿고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레반 보다 우선 아프가니스탄이 역사적 문좌적으로 다양한 민족들끼리 사이가 나쁜 지역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같은 민족들끼리도 부족과 가문이 다를 경우에 싸우기도 한다. 같은 민족이라도 가문이 다르면 서로 정치권력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목국가들의 근대화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생긴 약탈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세 가지 특징(외세에 대한 반감, 민족간 갈등, 부족간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의 접근 


러시아는 중세 근대까지도 유럽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유럽으로는 확장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하였는데, 영국은 당시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인도 코 앞까지 러시아가 기어내려오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먼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손을 뻗었고, 영국도 아프가니스탄과 친하게 지내려고 작업을 걸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먼저 손을 뻗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낸다. 이에 영국은 퇴위당한 왕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이렇게 영국은 이전 왕을 앞세워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1842)이었다.

 

영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영국이 세운 왕이 걸림돌이 되었다. 원래 외세를 싫어하던 아프간 국민들의 눈에 외세의 힘을 빌어서 왕이 된 왕을 별로 곱게 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외세에 대한 반감과 자기들이 왕을 해먹고 싶은 생각에 내란 쿠데타로 혼란을 겪게 된다. 영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이후 러시아는 1877년까지 꾸준히 현재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손에 넣는다. 영국을 쫓아낸 아프간은 러시아는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입장에서는 영국은 섬나라였고, 러시아는 커다란 대국으로 보였던 것 같다. 이때 러시아는 외교간을 일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다.

 

2차 영국-아프가니스단 전쟁(1878~188이 발발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파키스탄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대신에 영국의 입맛에 맞게 하기 위해서 외교에 간섭하겠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러시아 모두의 입장을 대변한 와칸 회랑’(Wkakan Corrikord)이라는 국경이 만들어진다. 당시 아프간 왕(압두르 라만 칸)은 러시아와 영국이 원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와칸 회랑은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역으로 활용되었다.

 

내전으로 얼룩진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외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애 내전에 바빴기 때문에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무조건 중립을 선언한다. 그런데 1차 대전 때 독일이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독일은 아프간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주면서 영국령 인도를 쳐들어가서 이익을 얻으라고 꼬신 것이다. 현명한 아프간 왕은 군사적 지원은 다 받고서 정작 인도로 쳐들어가지는 않는 먹튀를 시전한다. 그런데 특정 세력이 나서서 왕이 영국편을 들어서 영국령 인도를 쳐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다 끝난 시점에서 당시 아프간 왕(하비불라 칸, Habibullah Khan)이 암살을 당한다. 왕이 암살당한 1919년에는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주 짧게 있었지만 이후 1970년까지 50년 동안 아프간은 더 이상 외세와 엮인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며 평화를 누리는 듯 했다. 그런데 외세만 없었을 뿐 1928년부터 부족들이 서로 치고받는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외세가 들어오면 외세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자기들이 왕을 해먹으려는 정치군들도 많이 있어왔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 바로 옆에 1947년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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