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3] 조선에서 성질이 가장 더러울 뻔한 왕 (Feat.남이장군)
세조가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훈구척신들이 대농장을 소유하게 된다. 세조가 현직관료에게만 수조권을 부여하는 ‘직전법’을 사용한다. 이로 인해서 현직관료들은 퇴직한 후를 걱정하면서 대농장을 소유하는 지주들로 바뀐다.
- 세조가 왕이 되는데 도움을 준 공신들(구공신) : 신숙주, 한명회
-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된 공신들(신공신) : 이준, 강순, 남이
세조는 신공신들을 우대하였다. 28살인 이준에게 영의정을 시켜주었고, 26살인 남이에게 병조판서를 맡겼다(남이 장군은 태종의 외손자뻘이다).
[남이장군의 시]
백두산 바위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버리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려버리리라.
남아로 태어나 이십대에 나라를 평화롭게 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불러줄 것인가.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는 20살에 죽었고, 세조의 둘째 아들이 왕(예종)을 이었다. 세조는 예종이 대신들에게 휘둘릴지도 몰라서 그를 돕기 위해서 죽기 직전 구공신들을 원상으로 임명하였다.
예종은 재위가 1년 3개월 밖에 안된다(1468~1469). 훗날 인종이 8개월(재위 1544~1545)만에 죽었기 때문에 가장 짧은 치세를 누린 임금으로는 두 번째가 된다.
예종을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가 ‘임금님의 사건수첩’이다. 세자 시절에는 공부도 잘하고 착했다고 하지만, 왕이 되자마자 원상들과 의견이 충돌하였다. 세조의 묘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원상들은 ‘신종’을 제안했지만 예종은 자기의 아버지가 위대하다고 하면서 ‘조’를 붙이고 싶어했다.
원래 한명회의 사위가 예종이었다. 예종은 세자였을 때 12살에 아들을 낳았다. 이때 아들을 낳다가 한명회의 딸이죽었고, 아들도 3년만에 죽고 말았다.
예종은 아버지인 세조가 남이를 아끼는 것이 기분 나빴었던 것 같았다. 이때 고자질의 대가 유자광이 등장하여 남이의 쿠데타 시도에 대해 보고한다. 유자광이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꿔서 보고했다고 하는데 물론 야사로 전해진다.
남이는 고문을 받다가 자신과 같은 ‘신공신’인 영의정 강순이 자신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말한다. 당시 강순의 나이는 70이 넘었는데, 강순은 억울하게 고문 받고 자백하고 죽게 된다. 남이장군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무속 신앙에서는 ‘관우, 최영’과 함께 남이장군을 높이고 있다. 남이장군이 시신이 잠깐 있었다고 그 섬의 이름을 ‘남이섬’이라고 하였는데, 남이장군의 실제 묘는 화성군에 있다. 1970년대 무덤을 이장하려고 했을 때 시신이 썩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예종이 왕을 더 오래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조선에서 가장 성질이 더러울뻔한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예종은 당시에는 관행이었던 권력자의 집을 찾아가는 ‘분경’을 금지시켰다.
예종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독살당했을 거라고 의심을 받는다. 한겨울에 죽었는데 시신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황상 예종을 독살한 인물은 한명회일지도 모른다. 예종의 아들은 제안대군이었는데 나이가 4살이었기 때문에 왕을 하기 힘들었고,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큰아들이 월산대군이고, 둘째아들이 자을산군이었는데 왕은 서열상으로 낮은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다. 한명회의 또 다른 딸이 자을산군과 결혼했기 때문에 한명회가 예종을 독살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종과 사사껀껀 대립을 한 인물도 한명회라고 한다)
의경세자의 부인이 유명한 인수대비로 훗날 연산군의 헤딩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세조의 부인인 정의왕후는 예종 때와 마찬가지로 성종 때에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성종은 조선의 신하들이 보기에는 세종 보다 뛰어난 임금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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