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첫 번째 아내는 단경왕후 신씨(1487~1557)였는데, 연산군 때부터의 권력자 신수근(1450~1506)의 딸이었다. 신수근이 중종반정(1506)에 참여하지 않아서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수근의 딸이 중전이 되는 것이 못마땅해서 중전을 바꾸라고 한다. 중종은 조강지처를 보호하지 못하고 단경왕후 신씨는 7일만에 중전 자리에서 쫓겨난다.
중종의 두 번째 아내는 장경왕후(1491~1515)였는데, 첫째는 딸을 낳았고 둘째로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곧바로 죽게 된다. 장경왕후의 꿈 속에서 스님이 나타나서 아들 이름을 억명(億命)으로 지으라고 했고, 중종에게 유언으로 아들 이름을 ‘억명’으로 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종의 아명은 ‘억명’이었다.
중종의 세 번째 아내는 민비를 제외하고 조선을 통털어서 최악의 중전마마인 문정왕후(1501~1565)였다.
장경왕후의 아들인 억명(훗날 인종)은 소문으로 세 살 때 천자문을 떼었다고 한다. 그리고 6살에 세자로 책봉된다. 왕이 신하와 학문적 토론을 하는 것을 경연이라고 하고, 세자가 교육을 받는 것을 서연이라고 하는데, 서연을 함께 했던 신하들의 평가는 한결같이 최고의 칭찬이었다. ‘예의바르다, 사려깊다, 신중하다, 학문성취 능력이 뛰어나다, 교만하지 않다.’
당시 중종은 후궁이었던 경빈 박씨(1492~1533)를 굉장히 예뻐했다. 경빈 박씨의 아들 복성군(1506~1553)은 당시 세자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에 줄을 설 것인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작서의 변’(1527)이 일어나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유배갔다가 사약을 먹고 죽게된다. 이것은 세자의 유일한 혈육인 효혜공주(1511~1531)를 며느리로 두고 있는 권력자 김안로(1481~1537)가 꾸며낸 일이었다고 한다.
세자와 서연을 벌인 신하들이 식중독에 걸리는 일이 발생하면서 오늘날에는 문정왕후가 세자를 해치우려는 속셈이 있지 않았나 의심을 하고 있다.
결국 문정왕후가 중종의 아들을 낳는다. 그가 경원대군 명종(재위 1545~1567)인데, 세자인 인종은 경원대군 명종과 문정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는 세자를 독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1544년에 세자궁에 불이 났을 때 (야사에 의하면) 문정왕후가 불을 질렀고, 착했던 인종은 어미가 나를 죽기를 원하는데 죽는 것이 효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멍청한 행동을 했는데, 밖에서 중종이 세자를 부르는 것을 듣고 정신차리고 탈출했다고 한다.
중종이 죽은 뒤에 즉위한 인종은 3년 상을 치르면서 미음만 먹었다고 한다. 점차 몸이 상한 인종은 3년상을 치르면서도 계모인 문정왕후에 대한 문안인사를 단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보면 문정왕후가 말려 죽여버렸다고 생각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야샤에 의하면 문정왕후가 한번도 살갑게 대하지 않았는데 웃으면서 인종에게 다섯가지 떡을 먹으라고 줬고, 그것을 먹은 인종이 죽었다고 한다.
인종에 대한 실록의 좋은 평가는 무슨 이유인가? 중종 때 기묘사화(1519)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이 많이 죽었는데 인종은 조광조에 대한 복권을 시켜줬다. 조광조가 제안한 현량과를 통해서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들을 중종이 내쳐버렸는데, 인종은 그들의 명예도 다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사림의 입장에서는 인종은 성군이었고,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었을 때, 나라의 모든 유생들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인종이 죽은 뒤 바보 왕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의 횡포와 문정왕후의 외척인 윤원로(?~1547)와 윤원형(1503~1565)의 삽질이 시작된다.
중종반정(1506) 이후 중종(재위 1506~1544)이 왕위에 올라서 38년간 집권한다.
연산군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연산군 재위 12년(재위 1494~1506) 중에 마지막 2년에 미쳐 날뛰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연산이 가장 긴장하면서 경계했던 인물은 진성대군이었다. 성종이 폐비 윤씨 이후 새롭게 중전을 맞이했는데 그가 바로 정현왕후(1462~1530)였으며, 그의 아들이 진성대군이었다. 한번은 사냥을 나간 연산군이 진성대군과 누가 먼저 한양에 입성하는 가 내기를 한적도 있다. 자신은 흥인지문(동대문)으로 들어갈테니 진성대군에게는 숭례문(남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는데, 다른 이복동생인 영산군(1490~1538)이 자신의 말을 빌려줘서 간신히 한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은 성희안(1461~1513)과 박원종(1467~1510)이다. 성희안은 연산군에게 시 하나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말단관리로 좌천된 문신이었고, 박원종은 연산군의 큰어머니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의 오라버니 무신이었다. 그들은 군대의 일부를 진성대군 집으로 보냈는데, 진성대군은 반정이 실패하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말발굽인 줄 알고 자결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부인 신씨(1487~1557)가 말이 집앞을 향하고 있으면 우리를 잡아 죽이려는 것이고, 말 머리가 반대쪽인 집 밖으로 향하고 있으면 반정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인에게 보고 오라고 하였는데, 다행히 말이 밖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반정이 성공하면서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가 된다.
진성대군의 조강지처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1450~1506)은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성희안이나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반정에 함께 하자고 제했을 때, 반정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반정세력은 신수근 형제와 임사홍을 먼저 제거하였다. 이후 중종은 공신들에게 꼼짝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공신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죽인 신수근의 딸이 중전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중전을 폐하라고 압박했고, 결국 단경왕후 신씨는 7일 만에 쫓겨났다(1506.9.2~1506.9.9). 이때 인왕산에 중종이 볼 수 있게끔 빨간 치마를 걸쳐놓아서 ‘치마바위’ 전설이 탄생한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은 장경왕후(1491~1515)였는데 훗날의 인종(재위 1544~1545)을 낳다가 죽었다. 그리고 중중의 세 번째 부인이 문정왕후(1501~1565)로 훗날 명종(재위 1545~1567)을 낳았다.
중종 시대에 세종 때 『삼강행실도』에 대해서 『이륜행실도』가 만들어졌고,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에 대해서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삼포왜란(1510) 때 비변사가 임시기구로 처음 설치되었고, 처음 양명학이 들어왔으며,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만들었다는 것이 전해진다.
중종은 긴 재위 기간동안 공신들 눈치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1482~1520) 같은 사람을 불러들였다.
조광조는 현량과 실시, 향약 보급, 수미법 주장, 소학ㆍ주자가례 보급, 소격서 혁파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시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가 여론을 만들어 정승까지 날리는 시대였는데 조광조는 홍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검찰총장)을 역임하였다.
조광조를 죽이는 과정에서 남곤(1471~1527), 심정(1471~1531) 같은 훈구파들이 ‘주초위왕’(走肖爲王) 나뭇잎을 조작해 낸다. 실제로 실험해보면 벌레는 그렇게 나뭇잎을 먹을 수 없다. 중종이 조광조를 귀양보내고 사약을 내린다. 이때 조광조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기묘사화’(1519) 였다. 중중은 신하들을 통해서 신하들을 견제하다가 세력이 커지는 신하를 제거하고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38년 동안 제자리걸음만 하는 조선의 모습이었다.
[김지윤의 지식Play] 소련을 붕괴시키고 미국 보수의 역사가 되다, 레이건 대통령 일대기! | 미국사, 냉전, 소련 해체, 신자유주의, 공산주의
많은 사람들이 현대 보수의 아버지 하면 미국의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떠올린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 출신이었는데 사실 A급 배우는 아니고 B급 배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Screen Actors' Guild’(미국의 영화 및 텔레비전 배우 노동 조합)의 위원장을 지낼 만큼 사회적인 이슈라든지 배우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레이건과 그의 아내 낸시 레이건]
영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도 배우 출신이었다. 1949년 레이건 대통령이 전미 배우 조합의 위원장을 지내고 있을 당시에 미국 전역에 ‘Red Scare’라는 적색공포와 매카시즘이 막 불기 시작할 때였다. 적색공포는 1917~1920년과 1946~1957년 두 차례에 걸친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비미국적 사상에 대한 국민적 히스테리 증상이었는데 당시 매카시즘의 열풍으로 반공산주의가 만연하였고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데 열풍이 불었다.
당시 할리우드에도 공산주의 영향을 배우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동화가 된 사람들 이름을 적어놓은 리스트가 있었다. 당시에 낸시 데이비스란 여성이 조합위원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에 관심도 없고 싫어하는 사람인데 자기하고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공산주의 사상에 동화된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부탁한다. 레이건은 낸시 데이비스라는 여성의 이름을 블랙 리스트에서 빼주었고, 이후 3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이후 두 사람은 천생연분으로 해로한다. 레이건은 낸시가 없었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고(All would be without meaning if I didn't have you), 낸시는 자신의 진짜 인생은 레이건을 만나고 시작되었다고 말했다(My life didn't really begin until I met Ronnie).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레이건 대통령은 보수 그리고 공화당의 정신적인 지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원래 레이건은 민주당원이었다. 1950년대에는 민주당원으로서의 당적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1954년에 GE Theater라는 라디오 프로그램(General Electric Theater : GE가 후원하는 TV 및 라디오 시리즈)에 호스트를 맡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꽤 출연을 한다. GE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는지 명예홍보대사 같은 것을 맡게 되었고 레이건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연과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이들의 삶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정치에 투신하게 되는 그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해서 주로 기차로 다녔다고 하는데, 긴 시간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점점 생각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겨가게 된다.
1960년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케네디 대통령을 지지 하지 않고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존슨 대통령의 상대로 나왔었던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애리조나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지지 연설이 히트히트를 치게 되고 전국적인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지금도 많은 신인 정치인들이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면서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4년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하기 위해서 지지 연설을 하러 나왔던 버락 오바마를 들 수 있다. “진보적 미국이나 보수적 미국은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 존재합니다.”(there is not a liberal America and an conservative america. There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레이건 대통령도 당시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지지했는데, The Speech 혹은 ‘A Time For Choosing’(선택의 시간)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는 연설을 통해서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정부가 사람을 통제하지 않고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단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무력과 강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습니다.”
레이건은 1967년 1월 2일부터 1975년 1월 6일까지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맡게 된다. 그리고 대선에 두 번 정도 출사표를 낸 적이 있는데 조금 억울하게 공화당 경선에서 패한다. 그리고 1980년에 드디더 공화당 대선 후보 티켓을 획득하였고, 당시 지미 카터 민주당 대통령을 상대로 해서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다.
[레이건의 키워드 1]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레이건 대통령은 1979년 영국 총리로 올라선 마가릿 대처 총리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기수”라고 불린다. 이들의 경제정책, 즉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주의(Thatcherism)를 통해서 당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을 ‘레이건-대처 혁명’이라고 한다.
1930년대 대공황이 지나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각국 정부의 크기가 상당히 커지게 되었고, 재난 재해라든지 전쟁이라든지 국가적인 위기 사태를 통해서 정부는 권력을 많이 행사하면서 권한이 커지게 마련이다. 아울러 국민소득에서 정부의 지출이 커지고 세율을 높이고, 복지정책을 확장하고 정부가 시장에 많이 개임을 하는 Keynesian이라 얘기하는 그런 경제정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존 메이너스 케인스의 사상에 기초한 경제학(케인스 경제학)에서는 “단기적으로 시장경제가 불균형에 있을 수 있으며 이르 ㄹ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대화된 관료조직이 비효율, 재정 적자, 기업 활동 위축의 단점을 갖고 있었다.
어느 경제정책이든 한쪽으로(만) 가다 보면 결국에는 문제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관료조직이 비대해지면서 비효율적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게 되고, 재정적자라든지 또 높은 세율로 인해서 기업의 활동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여러 가지로 제동이 걸리게 된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부터 시작해서 시카고학파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밀턴 프리드먼 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레이건과 대처가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정책으로 구현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로는 규제를 철폐하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든지, 복지정책을 축소하고, 기업들이 활동을 더 많이 할 수있도록 법인세를 낮추어 주는 정책을 벌이는데, 이런 것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무론 이 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부의 불균형, 양극화가 더 심화되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에 ‘영국병’(British disease, 과도한 사회복지, 노조의 영향력 증대와 임금 상승, 생산성 저하로 인한 1970년대 영국의 경제침체를 비하하는 용어)이라는 것을 고쳤다고 해서 영국의 대처 수상이 상당히 존경을 받았고, 오일쇼크(1978~1981)를 지나면서 불안해진 경제, 그리고 강력한 통화정책(1981년 연방준비제도 기준금리 최고 21.5%)을 통해서 인플레이션까지 잡는 이른바 레이건의 경제정책이 그 당시엔 상당히 인기가 있다.
제2차 오일쇼크(1978~1981) : 세계 원유 공급의 15%를 담당하던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인한 원유 수출 중단에서 시작된 국제 유가 상승과 경제 혼란
레이거노믹스의 주요 정책 : 정부 지출 축소, 소득세 세율 인하, 정부 규제 축소, 화폐 공급량 조절
[레이건 키워드 2] 강경외교(Diplomacy)
레이건 대통령으로 인해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동구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된 것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에 해체가 됐으니까 레이건 대통령의 재임 시기(1981.1~1989.1)는 아니었다. 그런데 레이건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고 본다.
미국의 학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강력한 압박이 소련을 해체시킨 것이 맞다고 보면서 군비경쟁에서 소련이 재정적으로 힘들어질 수박에 없었고, 결국 해체의 길로 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러시아 쪽 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고르바초프라는 개혁 개방의 마인드를 가진 서기장이 등장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도 이야기한다.
레이건 대통령의 외교는 ‘힘을 통한 평화’였다. 전 세계에서 소련의 공산주의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세력을 심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등장한 시기가 1985년 3월인데 이 시기가 레이건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1981.1~1985.1)와 두 번째 임기(1985.1~1989.1)가 갈리는 시기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당시에 외교팀에는 네오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윌리엄 J. 케이시(CIA국장), 리처드 펄(국방 차관보), 진 커크패트릭(UN 대사) 등이 그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강경한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지칭하였고, ‘스타워즈’라고 지칭했던 SDI,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이 그 당시에 나왔다. 스타워즈라고 불렸던 전략방위구상은 핵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우주에서 요격을 해서 폭파시켜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임기에 들어서면서 레이건은 네오콘들과 약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의 의미있는 핵군축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중거리 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을 맺게 된다(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러시아의 조약 위반을 주장하며 폐기했다).
많은 미국인들의 머리 속에는 경제적인 부흥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세계 제일의 미국을 만든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의 롤모델이 레이건 아니었을까?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시 선거 구호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는데,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선거 구호는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흑역사]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적인 양극화와 지나친 민영화로 인한 폐해는 상식화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났는데, 적성국가인 이란에게 무기를 몰래 팔아서 그 자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의 반군이라 할 수 있는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을 해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통령 탄핵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실무진들이 책임을 지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일종의 꼬리자르기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민주당과 공화당, 인종문제에 대한 스탠스가 뒤바뀐 계기?]
노예해방을 가져온 링컨은 공화당 출신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화당은 점차 인종 문제에서 링컨과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1960년대에 흑인 민권운동이 일어났고, 1964년에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이 통과되면서 인종 종교 성별등에 따른 주요한 차별들이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1965년에 인종이나 피부색 등에 의해 선거 자격을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 도 통과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제36대 존슨 대통령 아래에서 통과되었다.
1964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당시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배리 골드워터 의원이었고 그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주 정부의 권한을 지나치게 억압해선 안된다’, ‘민권법은 연방정부가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의 권리를 인정해야 된다’라고 강력하게 이야기를 했던 인물이었다. 이때 흑인 유권자들의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낙점된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공식 유세의 첫 번째 일정으로 잡은 지역은 미시시피의 네쇼바 카운티(Neshoba County)였다. 1964년 6월, 흑인 유권자들의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는 freedom rides(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해 남부 지방으로 버스나 기차 여행을하던 시민운동) 운동을 하던 3명의 젊은이들이 남부를 여행하다가 행방불명된 사건이 있었고, FBI가 나서서 수사까지 하였고, 세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채 암매장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KKK단 그리고 지역의 보안관(Cecil Price) 경찰들까지 모두 연루가 되어 있었던 사실을 밝혀내었고, 이후 이 사건은 1988년에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의 모토가 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네쇼바 카운티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공식 일정의 첫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 이곳에서 했던 레이건의 연설은 ‘주 정부의 권리가 확장되어야 된다’는 내용이었고, 결정적으로 남부의 표심이 공화당으로 넘어가는 데 쐐기를 박았을 것으로 보인다.
[토론과 연설의 달인]
레이건은 토론과 연설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배우 출신이기 때문에 카메라에 대한 자연스러움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80년 대선 토론회에서 그는 “Are you better off then you were 4years ago?”(당신의 삶은 4년 전보다 나아지셨습니까?)라고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1984년 재선 때에 레이건은 73세라는 굉장한 고령이었는데 상대 후보는 56세의 젊은 월터 먼데일이었다. 나이로 인한 공세가 충분히 예상되는 선거였다. 그런데 레이건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가지고 이슈로 삼지 않겠습니다. 내 상대편 후보가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 경험이 없고 이런 점을 약점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할 말은 다 하고 상대방은 전혀 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에 월터 먼데일은 이 말을 들었을 때 딱 이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