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30일 수요일

[근대19] 동학2 - 백성 잡자고 외국 군대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근대19] 동학2 - 백성 잡자고 외국 군대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조선역사상 가장 큰 민란이라는 것이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전주 이씨)가 있는 곳을 점령당한 것이었다.

 

이때 고종이 먼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자는 제안을 하였고, 당시 관료들이 반대를 하였다. (민씨척족정권의 관료들조차 반대하였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다면 텐진조약(1885)에 입각해서 일본 군대도 조선땅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조선 땅이 양국의 전쟁터가 될 것이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종과 민비는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과는 달리 국력이 성장한 일본은 청나라와 한판 뜨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 명분을 준 것이 민비와 고종이다.

 

청나라는 189455일에 안산만으로 상륙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전혀 엉뚱한 인천으로 상륙하였다(189456). 일본은 동학군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동학군이 비록 전주성을 점령했지만 계속 홍계훈이 공격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주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 양국의 철병을 요구하기 위해서 홍계훈과 협상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58일에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동학군은 해산하고 그것을 명분으로 홍계훈은 청과 일본의 철병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서 조선 정부도 개혁의 의지로 교정청을 설치하게 된다. 이때 동학군은 전라도에 대한 개혁의 주도권을 달라고 해서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12개조 폐정개혁안]

  1. 각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4. 물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5. 노비 문서를 불태울 것
  6.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게 한 평량갓을 폐지할 것
  7. 청춘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9. 관리 채용에 있어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일본과 상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할 것

 

이 폐정개혁안은 동학사라는 책을 쓴 오지영(1868~1950)에 의해 증명된 것으로 당시 폐정개혁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역사학계에서는 동학군이 주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폐정개혁안을 보면 동학군이 반봉건, 반외세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2조에 토지 개혁을 제안한 것을 보면 10년 전 갑신정변(1884)이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농민의 지지를 못받은 반면 동학농민운동(1894)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학군이 해산한 이후 청나라는 철병의 의사가 있었지만 일본은 전혀 철병의 의지가 없었다. 개항 이후 1882년까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던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청나라 상인이 조선의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1894년까지 일본과 청나라의 무역이 대등한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일본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이 18946월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대원군을 앞세웠다. 대원군은 자신이 일본의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알고 동학농민군에게 다시 봉기할 것을 명령하였다. 대원군은 동학군이 남쪽에서 북상하고 청나라가 북쪽에서 남진해서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동학군의 입장에서는 다시 봉기를 하게 된다.

[근대18] 동학1 - 남도퍼레이드(황토현&황룡촌 전투)

[근대18] 동학1 - 남도퍼레이드(황토현&황룡촌 전투)

 


아프고 슬픈 역사이지만 자랑스러운 역사 동학농민운동

 

18941월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저항하여 고부민란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용태(1854~1922)를 파견해서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는데, 이용태는 조병갑 편을 들면서 전봉준을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하였다. 이에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이 3월에 백산에서 모였는데 이때 8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이었으며 주동자가 누군지 모르게 하기위해서 사발통문을 이용하였다.

 



[전봉준의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대 두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농민군 4대 강령]

  1. 사람을 죽이거나 가축을 잡아 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동학군 1차 봉기]

 

백산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1894.4.7)하고 남쪽 지방을 돌면서 탐관오리를 몰아내기 시작했다(남도 퍼레이드).

 



그리고 장성에서 관군과 대결하였는데(황룡촌 전투 1894.4.23) 이때 초토사로 내려온 인물이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해냈던 홍계훈(1842~1895)이다. 황룡촌 전투에서 농민군은 장태와 죽창으로 관군을 물리쳤다. (당시 농민군이 얼마나 열악한 무기를 가지고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동학군은 전주에 무혈입성하였는데, 장날에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전주성에 들어가서 접수해 버린 것이다. 전주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뿌리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전주 이씨).

[최진기의 역사로 보는 정당정치 - 4강] 영국 노동당의 성공과 실패 요인

[최진기의 역사로 보는 정당정치 - 4] 영국 노동당의 성공과 실패 요인

 

노동당의 두 번의 성공

  • 노동당의 첫 번째 성공 - 클레멘트 애틀리 : 베버리지 보고서의 등장
  • 노동당의 두 번째 성공 - 토니 블레어 : 3의 길 등장

 

[노동당의 첫 번째 성공]

 

19452월 치러진 여론조사 결과 처칠 내각의 지지율은 83%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노동당의 압승이었다. [노동당 393, 보수당 197]

 

당시 보수당(윈스턴 처칠)은 치안, 안보, 국유화, 반공 노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노동당(클레멘트 애틀리)는 주택문제, 일자리 문제, 경제문제를 들고 나왔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노동당이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시 31세 나이로 자원입대하였고, 갈리폴리 전투 참여 후 소령계급으로 전역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전시내각에 참여하였다. (1차 세계대전 전후 노동자 계층의 노선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은 자본가 계급의 탐욕으로 일어난 것이므로, 노동자 계층이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애틀리는 전쟁 참여를 주장했던 것이다.

 

애틀리는 전쟁 영웅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낙인을 피할 수 있었고, 이후 나토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625 때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였다(미국에 이어 두 번째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다. 결국 파병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실각하게 된다). 그리고 안보를 위해서 독자적 핵무기 개발에 앞장섰다.

 

진보세력도 외연을 확장할 때 승리한다!

 

애틀리는 당시 우파 계열의 이슈(애국, 반공, 안보)를 선점하였고, 노선 확장을 통해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당시 베버리지 보고서를 쓴 베버리지는 보수 우파 경제학자로 노동자들에게 최소한도로 보장해야 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노동당의 두 번째 성공]

 

토니 블레어에 대한 별명이 ‘Tory’ 블레어라 불릴 정도로 노동자 계층이 아니라 지주 계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시의 애완견(Bush's Poodle)로 불리기도 했다. 아파트 30채 등 1000억대 재산을 보유하면서 전혀 노동자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2005년의 총선 구호는 노동자들의 입장이 아닌 경영자의 입장인 일하는 영국이었다.

 



[3의 길]

  • 영국 노동당이 미국이 민주당과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지적은 이래서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옳지 못하다. 영국 노동당은 분명히 차별화된 정책을 갖고 있다. 그것은 3의 길이다. ‘3의 길은 좌파나 우파간의 단순한 산술적 합의나 평균적 중립이 아니다. ‘3의 길은 분명 중도 내지 중도좌파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 가치를 전세계의 기본적인 사회 경제적 변화에 적응시켜 낡은 이데올로기적 극단에서 탈피하자는 게 목적이다.”
  • 복지감소 - 국유화 - 전쟁
  • 3의 길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노동당의 두 번의 실패 - 경제 위기가 올 때마다 정권을 내어주었다.

  • 1931- 경제대공황
  • 1979- 오일쇼크

 

[노동당의 첫 번째 실패]

 

노동당은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1923년 보수당측 총리 볼드윈이 국회를 해산시키고 총선을 진행했는데 38%로 과반 달성에 실패하고 노동당과 자유당의 연정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1당이 되었다.

 

집권 정당인 램지 맥도널드는 경제 대공황이 닥쳤을 때,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지지층의 이탈로 이후 선거에서 패배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금본위제였다. 무역적자는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 대국으로 미국이 부상하면서 영국의 제조업이 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역적자가 확대되면서 실업자가 증가하게 되고, 실업수당이 증가하게 되면서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금본위제는 화폐를 많이 찍어내면 붕괴한다. 왜냐하면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상당수 자본가들이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영국은 미국에게서 돈을 빌리기로 하였다. 당연히 미국은 영국에게 긴축재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은 실업수당의 삭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선거에서 보수당이 470석의 압승을 거두게 된다.

 

산업경쟁력 상실 재정 적자 미국에 차관 요구 긴축 요구 긴축 실행, 노동자 지지 상실 선거 패배

 

돈을 찍어내지 않음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노동당이 자기네 편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위기 때에는 지지층의 결집이 필요하다)

 

[노동당의 두 번째 실패]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 1939년 출간한 존 스타인벡이 소설. 미국의 노동자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당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 1961년 출간한 존 스타인벡의 소설. 명문가의 후손이나 지금은 사점 점원에 불과한 주인공이 물질적 욕구로 말미암아 도덕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였다.

 

위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1978~1979년 복지 예산 삭감으로 인하여 국민들이 일으켰던 혼란의 시기를 영국의 불만의 겨울라고 한다.

 

오일쇼크로 인하여 화폐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영국 정부는 IMF에서 돈을 빌리게 되었다. 이때 IMF는 긴축 재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실업자가 증가하게 된다. 이때 영국 정부와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동결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3년 후에 정부가 다시 임금억제를 요구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졌고 결국 파업으로 이어졌다.

 



IMF 구제금융 신청 긴축재정, 임금억제 등 요구 계속되는 임금 억제 협약 거부, 파업 시작

 

선거제도가 완벽히 공평한 운동장은 아니다. 보수 세력이 정치(선거)에서 유리한 이유는 1) 지지층의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며, 2) 가치 논쟁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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